우린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지난 4월 말, 5월 연휴가 막 시작되려는 그날, 남편과 나는 중국 여행을 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갔다.
오후 4시에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쯤 되었다.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로밍을 하려고 SKT대리점을 찾으니, 당일 출국자에 한해 유심침을 교환해 준다는 안내판이 붙어있고, 그 앞에는 길게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도 유심칩을 교환하기 위해 줄을 섰다. 앞에서 통신사직원들이 쉬지 않고 유심칩을 갈고 있음에도 대기줄이 좀처럼 짧아지지 않았다. 비행기 출발 시간을 놓칠세라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여유가 있으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돼, 하고 한 시간 동안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유심칩을 교환받기 위해 여권과 폰을 내밀었다.
"저기 이 여권은 김상우씨건 데요? 본인 거 없으세요?"
남편이 내민 여권을 받아 든 직원이 남편에게 여권을 되돌려 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남편 여권인 줄 알고 가져온 건데? 다른 여권이 있을 리가 없다.
여권을 도로 받아드는 남편의 얼굴이 노래졌다. 충격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했고, 그걸 보고 있는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아서 무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 유심칩을 교환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악몽같은 실수가 벌어진 거다. 혹시 여권을 빠뜨릴세라 여권 챙겼어? 하고 몇 번이나 물어봤건만. 그럴 때마다 남편은 여권을 넣은 앞주머니를 손으로 툭툭 치며 여기 여권 잘 챙겼지. 하고 자신있게 몇 번이나 확인해 주었건만. 그 여권이 아들 여권인 줄은 몰랐던 거다.
누구 잘못인지 따질 수도 없었다. 내가 건너준 여권을 남편이 받아 넣었다고 했으니, 내 잘못일 확률이 크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은 자기 잘못도 크다고 남편이 말했다. 나에 대한 비난을 애써 자제하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난 분명히 당신 사진을 확인하고 여권을 건네줬는데. 게다가 그 여권을 갖고 아침에 온라인 챜크인을 했으니 내가 잘못 건넜을 리가 없잖아. 당신이 그 여권을 어디다 두었다가 주머니에 넣을 때 잘못 집어넣은게지'라고 무작정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서 잘잘못을 따져서 무얼 하겠는가. 이미 실수는 저질러진걸.
그래서 우선 시간을 봤다. 7시 30분쯤 되었고 비행기는 10시 30분 출발인데, 적어도 10시까지는 출국장을 통과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럼 시간이 2시간 30분쯤 여유가 있으니 당신이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갔다 오는 건 어때? 티맵으로 확인 해보니 여기에서 집까지 한시간 조금 더 걸린다는데"
하고 내가 물었다. 지금 당장 전속력으로 달려나가서 때마침 게이트 앞에 딱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안막히는 지름길로 시속 100키로로 달려갔다가 얼른 여권만 잽싸게 집어서 다시 달려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안돼. 시간이 너무 빠듯해.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돈은 돈대로 버리고, 결국 비행기도 놓칠 확률이 많아. 일단 여행사 직원에게 문의해 보자."
하고 모험을 싫어하는 소심쟁이 남편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공항 끝에 자리 잡은 OO투어 여행사창구로 마치 달리기 경주 하듯 급하게 뛰어갔다.
하지만 너무 급히 오느라 내 여권마저 SKT 대리점에 놓고와서 다시 SKT대리점까지 뛰어갔다 와야했다. 수화물을 보내기 전이라 캐리어를 밀면서 뛰느라 그렇게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운동은 제대로 되는지 이마에 땀이 흘렀다.
우리의 설명을 들은 여행사 직원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기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집에 있는 누군가가 여권을 들고 오는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지?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큰 아들은 수업에 들어가라고 집에서 쫓아냈고, 작은 아들은 오늘 늦게까지 회식이 있다고 차도 안 가지고 갔는데. 지금쯤 한창 직장 근처에서 술을 퍼 마시고 있을텐데.. 내 머릿속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후유증이 덜 남을까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이웃분의 전화번호가 내게 있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분에게 부탁해 볼까? 그분과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일 뿐 친한 관계는 아니지만. 만약 누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나는 흔쾌히 들어줄텐데.. 그분도 그러지 않을까. 만약 그분이 집에 있다면, 아래층에 내려와 우리 집의 안방 서랍장에서 여권을 꺼내 카카오 택시기사에게 전달해 주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분에게 전화를 했고, 다행히 그분은 집에 계셨다.
그분은 카카오택시를 부르는 방법을 모르지만, 내가 택시를 불러주면 기사분에게 여권을 전달해 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하셨다.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안심이 되어 열심히 핸드폰을 누르며 카카오 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택시앱으로는 공항에 앉아서 집으로 택시를 부르기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러면 콜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콜택시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전화번호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콜택시회사로 전화해서 택시 좀 불러주세요. 하면 흔쾌히 택시를 부를 수 있었는데. 퀵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유심칩을 바꾼 탓인지 에러가 생겨 그마저도 안되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결국 포기했다.
할 수 없지. 그분에게 택시를 잡을 수가 없다고 연락드리고 혹시 그쪽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을까요? 하고 공손히 물었는데, 요즘 택시가 잘 안 보여서요. 하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렇죠?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금 허탈했지만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는 수밖에.
남편만 포기하느냐 둘 다 포기하느냐 선택해야 하는데...
남편은 나 혼자라도 갔다 오라고, 자기는 원래 가고 싶지 않았노라고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당신이 가. 내가 남을게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여권이 없는 것은 남편이니까. 내가 가야 하는데 나도 혼자서는 가기 싫었다. 그깟 중국 안가면 어때서. 먼 유럽이 아니고 가까운 중국이라서 다행이야,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혹시....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여권을 갖다 줄만한 사람을 찾았다는 거다. 공항 픽업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인데 지금 여권을 가지고 갈 거라고 하셨다. 옆에서 그분의 남편분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분의 남편분이 인맥을 동원해서 해결책을 찾으신 것 같았다.
"어머나. 이렇게 고마울 수가... 신경쓰게 해드려 정말 죄송해요"
정말 죄송했다.
"제가 애가 타서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하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곧이어 택시기사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신속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는 믿음직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켰다. 말한대로 신속하게, 한시간 반만에 여권을 가져다 주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시장님이 전화를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고 여권을 주면서 기사님이 말했다. 윗집 아저씨의 넓은 인맥이 시장님까지 미쳤나 보다. 이렇게 송구할 수가. 우리는 그제서야 화물을 부쳤고 남편과 같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분에게 갑자기 그런 부탁을 드려 미안하기도 하고, 본인의 일처럼 애타하시는 심성이 너무나 고맙게 여겨졌다. 무엇보다 늘 의례적 인사만을 주고받았던 관계가 이번일을 계기로 좀 더 친밀한 이웃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여권을 분실했거나, 집에서 안가져온 경우, 우리처럼 남의 여권을 잘못 집어온 경우, 인천공항내의 여권민원센터에서 긴급여권(임시여권)을 발급 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발급 시간은 약 1시간~3시간 정도 걸리며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이다. 우리는 그런 센터가 있는 줄 몰랐다. 알았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용할 수 없었을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