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라는 게 그렇지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엔 뭐를 먹을까 생각해본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은퇴자라서 하루 세끼를 같이 먹을 수 밖에 없다. 날마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것은 삼식이를 둔 주부라면 알겠지만 고민 중의 고민거리다.
아침에는 되도록 국을 끓이고, 점심에는 비빔밥이나, 찌게를 놓고 먹으며, 저녁에는 아들을 위해 고기를 볶거나 구워서 먹는 편이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나에게 특별히 부담되지는 않는다. 어떤 음식을 만들까 결정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메뉴가 결정되고 재료가 준비되면 즐겁게 음식을 만들어낸다.
오늘 아침은 콩나물국, 계란찜, 감자전, 시금치 무침, 김치, 두룹짱아치, 김, 요구르트 등이다. 나는 아침에 밥을 먹지는 않지만, 남편은 꼭 국과 반찬을 차려놓고 아침을 먹는다. 나는 밥대신 두부와 계란을 먹고, 과일이나 당근, 요구르트, 견과류 등을 먹는다.
열무김치 반찬통을 열려다가 남편이 말한다.
"열무 김치는 지금 먹지 말고, 점심 때 열무 비빔밥 해먹자"
나는 별 생각없이 딴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가 응... 하고 말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가. 아니면 잠깐 머뭇거렸던가.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남편이 황급히 말을 바꾼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점심은 당신이 먹고 싶다던 그 코다리 냉면 먹으러 가자."
나는 냉면을 참 좋아한다. 요즘 날씨가 슬슬 더워지기 시작해 언젠가 도서관 근처의 냉면집을 가자고 말했었는데, 남편이 그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나는 냉면 생각에 입이 벌어져 "그럼 그럴래?"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남편이 박수를 치며 무척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휴 겨우 답을 맞췄네. 당신 대답이 작아서 내가 눈치를 챘어. 열무 비빕밥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답을 그냥 알려주면 안돼? 눈치보고 답 맞추기 힘들어. 점점 어려워져"
아침부터 남편은 나를 골려먹기 시작한다. 마치 아내 눈치보며 아슬아슬하게 사는 공처가 역할에 빠져서 나를 놀리고 있다.
요즘엔 남편도 내 눈치를 보고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결혼한지 30여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내가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나와 성격이 맞지않는 남자와 사느라고 내가 많은 것을 참고 또 참아왔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남편도 나와 사느냐고 힘들지 않았을까? 남편도 나에 대해 많이 인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젠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말들은 절대 꺼내면 안되는지 알고 있다. 평소에는 너그럽고 따뜻한 남편이지만, 언제 나의 말한마디에 얼음처럼 차가와지고 돌처럼 완고해져서 날카로운 말의 창들로 나를 후벼파며 공격해올지 모른다. 그럴때면, 일상을 흐르는 평화가 이렇게 한순간에 깨져버리는 얇팍한 기반위에 세워져 있었던가. 하고 새삼 절망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차가움도 금방 지나간다고, 곧 다시 따사로운 봄날같은 평화가 찾아올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게 봄날과 겨울을 오가면서 이제껏 지내왔다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밥통에 밥이 좀 남아서 아무래도 오늘은 열무 비빔밥을 먹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남편은 열무 비빔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점심 때 열무 비빔밥을 먹으면서 내게 말했다.
"처녀도 열무 비빕밥을 먹으면 애를 밴대."
이건 또 어디서 끌어내어 꾸며내는 말일까? 처녀가 어떻게 애를 배? 열무 비빕밥을 먹으면 성모 마리아라도 돼? 나는 공격적 어조로 남편을 힐난하지만, 남편은 열무 비빕밥을 먹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니까 너무 맛있어서 먹고 또 먹다보면 처녀도 애밴 여자처럼 배가 불룩 나온다는 말이지."
점심을 먹고 같이 도서관에 가면서 남편은 손을 내게 내민다.
"손. 낮에는 오빠 손. 밤에는 오빠 품. 그러면 우리 사라는 안전해"
그럴때마다 나는 오글거려서 손을 뿌리치고 한 대 때릴 듯 위협한다.
"때릴까? 맞을래?"
요즘엔 봄날이다. 가끔, 이렇게 농담하고 웃으면서 같이 도서관을 다니는 이 시절이 얼마나 오래 갈까, 남편의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며 언젠가는 이 시절이 무척 그리워지는 때가 오겠지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