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과 자영업자, 두 정체성을 헤매는 나날.
아침에 급하게 손톱을 잘랐다. 바짝 잘린 정갈한 손톱이 주는 인상을 좋아한다. 손톱의 길이가 1mm를 넘게 자란 지 한참 되었는데, 자르기를 미뤘다. 도저히 손톱을 방치할 수 없어 출근 전 허겁지겁 손톱을 잘랐다. 정갈한 손톱만큼 손톱 자르는 시간을 좋아하는데, 여유 없이 잘랐다. 손톱 자르는 시간을 챙기지 못한 건 평일에는 회사를 나가고 주말에는 서점을 보느라 자잘한 데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다.
인턴에서 정직원이 된 회사의 업무는 같은 값을 받고도 더 구르고 해내야 했다. 구르는 시간은 늘어났는데, 1의 몫을 해냈는지는 의심이 든다. 일당백은 바라지도 않는다. 서점에 오면 그런 의심이 사라진다. 선택도 책임도 오로지 나의 몫이다. 이런 근무환경을 바라고 서점을 열었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못해 회사에도 나가는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평일에 회사에서 8시간을 보내고, 주말에 책방에서 8시간을 보낸다. 휴일 없는 8시간의 반복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확실한 건 두 가지 일을 함께 시작했다는 감각이다. 처음에는 책 읽는 회사다 보니 책방 일을 업무 시간에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인턴 때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직원이 되고 나니 눈치가 심하게 보인다. 모두 너무 바빠서 내가 잠시 한가할 때도 한가한 티를 낼 수 없다. 두 가지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라도 책방과 회사는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빠르게 체득했다. 어느 날은 퇴근 후에 회사 업무를 책방에 가져와 보기도 했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회사에 결과물을 들고 가니 노력이 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에 힘을 빼야 할지 사회초년생은 감을 잡기 어렵다. 온종일 몸에 힘을 주느라 물속에 꼬르륵 잠기는 날이 많다. 균형 잡기가 최우선인데, 회사 신입과 자영업 초보의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 기우뚱하기만 하다.
갸웃거리는 나에게 회사 선배는 쉽게 조언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답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누가 정답을 알고 있을까. 그건 회사 사장도 모를 것이다. 책방을 언제까지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어느 시점에 걸음마를 떼고 내게 말을 걸며 돈도 가져다줄지 그건 책방의 사장인 나도 모른다. 그리고 분명 나는 상처 받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을 선배에게 들은 날도 울고 말았다. 서점을 지속시키고자 시작한 회사 업무인데 감정 소모가 크고 보내는 시간도 길고, 해내야 하는 일도 많다. 회사에 있다 서점 관련 업무 때문에 바삐 나가 전화를 받을 때면 헛웃음이 난다. 무엇 하러 일을 벌였을까. 나에게 되묻는다. 모래주머니를 양발에 차고 걸으니 숨이 차는 게 당연하다.
그럴 때면 시작하기로 한 나를 위로하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한쪽 다리에만 모래주머니를 차고 걸었으면 분명 허리든 무릎이든 디스크가 왔을 것이다. 오래 걷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를 따라 가지고 온 음료를 책방 한구석에 놓고 엄마 손바닥만 하다며 책을 가리키는 아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섬세하게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책방에 5개의 의자를 세트로 사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조명을 내려놔야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은 비 오는 일요일에 다른 감정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두 가지 일을 함께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회사에서 번 돈으로 책방에 빈틈을 메꿀 수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자라난 손톱을 가만 바라본다. 일상에 쫒기는 와중에도 자라난 손톱. 손톱을 방치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잘 먹고 잘 자서 자랐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손톱은 자란다. 어릴 때 무거운 유리문에 손톱이 끼어 오른손 엄지손가락 손톱이 몽땅 뽑힌 경험이 있다. 몽땅 뽑혀도 자라는 게 손톱이다. 맨들맨들한 살을 타고 손톱은 없던 일처럼 단단하게 자랐다. 두 가지 일을 함께 시작해 벅찰 때면 손톱을 보기로 한다. 영화 <벌새>에 영지 선생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손가락은 움직여진다는 그 위로를 떠올리면서 나를 다독인다. 시작했다면, 헤매더라도 손가락은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손톱은 단단하고 꾸준하게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