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 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May 15. 2017

만나고 싶었던 책 대신 마주친 시집

출판물 리뷰_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마


밝아지기 전에, 한강


  제주도에 내려와 한 달 째 게스트 하우스 스텝 일을 하고 있다. 그동한 서비스업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화가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내 작은 실수가 그들에게는 아주 큰 무시로 다가간다. 이유 없는 화를 받아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퇴근 길에 애꿎은 것들을 발로 차며, 집에 와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는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분한 일을 늘어놓는다. 내 안에도 화가 많다. 그저 '그런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넘기기에는 아직 어리다.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로 대뜸 화를 내며 욕까지 얻어 먹고는 그 남자가 원하는대로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했다. 다른 스텝들이 없어 카운터를 비워야 했지만, 얼른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버럭 화를 내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사람은 당연히 무섭다. 특히 성별이 남자면 더욱이. 자신의 그런 행동이 대부분의 여성이 겁을 먹는다는 걸 이용하는 남자들은 정말 역겹다. 그 남자가 그런 사람인지, 원래 다혈질인지는 모르겠으나 나가는 내내 무서워 남자인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해 혼자 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내게 화를 낸 남자 택시 기사는 내가 오는 걸 보더니 가버렸다. 상대가 사라지는 걸 보며 안도했다. 여자로 태어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은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일이 결코 아니다.

  멀뚱하게 서 있는 남자 손님이 어두운 길에 서 있었다. 손님이라 부르기 싫지만, 어쨌든 그는 오기 전부터 전화로 내게 상식 밖에 질문을 하고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감이 1시간 남은 밤에 전화로 예약을 하며 이상한 걸 물어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그가 탄 택시기사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로 내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손님이 아닌 사람에게 분한 일을 당한 건 처음이라, 더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쿵쾅대며 걸어갈 퇴근 길도 없다. 뒤돌면 누울 수 있는 방만 있을 뿐이다. 부모님에게는 욕까지 먹으며 연고 없는 섬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차마 못하고, 돌아온 스텝 언니와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에게 털어 놓으며 정말 고마운 위로를 받았다. 그러고도 억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마음을 진정시킬 시를 찾으려 인터넷 검색을 했다. 사랑 이야기를 하는 시는 필요 없었다. 우울한 자기 연민을 담은 시도 공감은 되었으나, 더 우울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한강의 <밝아지기 전에>의 한 구절을 보았다. 처음에는 시인줄 알았다. 찾아보니 <노랑무늬 영원>에 나온 대목이더라. 다음 날 함덕에 가려 했다. 함덕에는 만춘서점이 있다. 서점에 들릴 계획은 없었지만, 꼭 저 글이 실린 책을 사고 싶었다.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마 


  소설의 상황은 모르겠으나, 이 글귀만은 너무나 와 닿았다. 친구의 위로가 담긴 메세지에 또 잊어버리려 하지만, 자꾸만 불쑥 떠올랐다. 잠 못 이루며 시를 찾던 나에게 잠 못 이루지 말라며, 존재하지 않은 잘못을 껴앉지 말라는 말은 정말로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누구의 비난도 믿지마

  무엇보다 이 마지막 구절이 좋았다. 그가 내게 화를 내고 비난을 한 것에 납득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다고 했지만, 더 정확한 이유가 필요했다. 이유 없는 화였기 때문에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의 비난을 믿지 말아버리라는 말을 들으니,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서점에 그 책은 없었다. 다른 한강의 소설 네 권 정도가 꽂혀 있었고 얼굴이 바뀐 서점원에게 물어보니 그 책이 다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소설은 그닥 끌리지 않았다. 다만 시를 찾을 때 느꼈던 불편함이 떠올랐다. 인터넷에는 많은 시를 검색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을 달랠 시를 찬찬히 살펴 보기는 어려웠다. 시집이 있는 곳을 물었다. 그곳에도 한강의 책이 있었다. 여러 시집 중에서 더 마음에 드는 시집이 있었지만, 한강의 시집을 놓기 어려웠다. 이미 그의 글에 큰 위로를 받은 상태라 그가 쓴 시가 궁금해졌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사

  결국 이 시집을 사고서 카페에 가 단숨에 읽었다. 안타깝게도 <밝아지기 전에>처럼 울림을 주는 시는 없었다. 간혹 다시 읽어보게 되는 글귀를 보긴 했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쩌면 너무 많은 시를 읽다보니 그 안에 담긴 메세지가 전달이 안된 걸 수도 있다. 다음에 이 시집을 읽을 땐, 필사를 하며 읽기로 했다. 쓰면서 읽으면 또 다른 바를 느낄지 모른다. 시를 쓰는 일은 고요해 시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시를 찾던 밤 또 하나의 공감이 가는 시를 발견하였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비정상시- 김경주

그래,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며 좋아하는 많은 일을 하는 동안 셀 수 없는 힘을 얻고 있지만, 그 새로운 곳이 주는 낯설음과 예기치 못한 일들에 고통 또한 받고 있다.


  이건 또 어디서 나온 구절일까 찾아보니 '비정상시'는 아주 긴 시였다. 그 시를 일하는 내내 잠깐 잠깐 쓰고 있지만, 저녁이 되가고 있는 지금 아직까지 끝을 보지 못했다. 읽어보기에도 긴 시라, 쓰면서 읽는 중인데 새로운 구절 모두 새로운 감탄이 나온다. 쓰기를 잠깐 망설였지만, 시작하길 잘했다. 아마 한강의 시집도 다시금 쓰면서 읽으면 그 느낌이 남다르지 않을까.     

  아무래도 바라던 감동이 없으니, 더 <노랑무늬 영원>이 없던 게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 책이 없어서 또 다른 시집을 마주쳤다는 건 의미가 있다. 아마 조금 더 규모가 있는 서점이 었다면 그 책이 있었을지 모른다. 또 굳이 서점에 찾아갈 필요 없이 인터넷으로 배송시켰다면 더 편하게 책을 받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함덕에 갈 일이 없었다면, 함덕에 만춘서점이 없었다면,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읽을 수는 있었겠지만 한강의 시집을 들춰볼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필사의 소중함도 몰랐을 것이다. 빠르고 신속하고 정확한 것에 반대는 예상하지 못한 마주침들 아닐까? 돌아갔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있다. 동네 책방에서는 원하는 책을 다소 느리게 만날 지 모르지만, 그곳이기 때문에 얻게 되는 새로운 마주침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공간의 매력, <만춘서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