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과 몸을 살피는데 게으르지 않기!
나는 참 나의 몸과 감정을 살피는데 둔한 사람이다. 극한에 가서야 ‘내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만 40이라는 나이가 되었을 때다. 아이들을 키우며 낮잠을 자지 않던 내가 밖에 나갔다 오면 거실에 짐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 그냥 뻗어 큰 숨을 쉬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숨을 돌리려고 잠시 누운 것뿐인데 눈을 뜨면 20~30분이 지나있었다. 마치 기절을 한 듯 쓰러져 있다 일어나는 것 것 같았다. 육아를 하며 낮잠을 자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큰 숨을 쉬는 일이 잦아지고 잠을 자는 시간 동안도 화장실에 가는 일이 너무나 잦았다. 병원도 잘 가지 않는 나인데 감당할 수 없이 느끼는 피로감과 기타 보이는 증상들에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어 그제 서야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결과를 듣고 보니 참 여러 해를 이렇게 앓고만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선근증을 앓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로 인해 철분과 칼륨의 수치가 정상수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까지 한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인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지 내가 생각해도 의아했었다. 그런 내 모습을 후회하고 자책을 하면서도 같은 상황들이 자꾸 되풀이되었다. 철분, 칼륨 수치가 이렇게 낮은 것을 알고 나서야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양약에서는 선근증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 시술로 치료를 받고 병에 대해 더 검색을 해보니 한의학에서는 오랜 기간 몸이 허약한 상태로 있게 되면 얻게 되는 병으로 나와 있었다. 가리는 음식은 하나 없는데 한약은 애기처럼 껌 하나 준비하고 먹어야 하는 나는 한약들을 잘 못 챙겨 먹었다. 그동안 살만 했나 보다. 내 몸이 감당이 안 되니 한의원에도 찾아갔다. 체력적으로 강성이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임신을 해도 60kg를 넘어 본 적이 없었지만 한 번도 약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깡다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의사분이 맥이 너무나 약하고 몸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강한 의지로 여기까지 버텨왔다고 하시며, 과거에 태어났으면 그 의지로 독립운동도 했을 사람이라고 농담을 하셨다. 그동안 너무 몸을 안 돌보며 지냈다고 이제 주변도 그만 돌아보고, 아이들도 좀 뒤로하고 내 몸을 돌보라고 하셨다. 심지어 하고 있는 일들을 다 내려놓고 집안일마저도 최소로 하며 몸을 회복시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한마디를 하셨다. 체질적으로 약한 사람이라 세 아이를 낳고 기르기도 벅찼을 텐데 이 소중한 아이들과 오래오래 살려면 이제는 그 의지로 내 몸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데 정신이 번쩍 났다.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일침을 놓는 경고의 말씀처럼 들렸다. 나는 그때부터 더 이상 자정을 넘어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여나 자정을 넘어 자면 몸이 무섭게 힘들다고 말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더 내려놓고 나를 받아주어야 했다. 아이들을 잘 돌보려면 나를 먼저 이해하고 돌아보는 것이 먼저였는데 그것에 무심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뒤로 나는 ‘아이들과 오래 살려면’이라는 한의사님의 말씀이 자꾸 떠올라 내 마음과 몸이 뭐라고 말하는지 귀 기울이기를 연습했다.
나는 무척이나 사교적인 사람이다. 짧은 시간에도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이 있다. 어릴 때부터 통지표에는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고, 인기가 많고 라는 내용들이 많았던 나였다. 학교 엄마들 모임 부분에선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을 나누는 묵은지 같은 지인들과는 깊은 정을 나누는 사람이다. 주변에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 많고, 또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잘 몰랐다. 내가 얼마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지를. 나는 세 딸과 복닥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는데 늘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들을 내어주었다. 때때로 부부 문제나 가정사의 속사정을 토로하는 전화들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세 딸에게 갈 에너지가 고갈될 때가 많았다. 울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주느라 많은 에너지를 쏟고 나서 아이들에게 여백 없이 화를 쏟기도 했으니 내가 얼마나 자기 이해가 부족한 사람인가? 바운더리가 필요했고 우선순위가 필요했다. 아이에게 쏟는 화는 아이의 문제이기보다 내가 나를 알고 돌아보는 일에 부족했기에 생기는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나를 잘 보고 있지 않아 아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왕래가 차단되었고 아이들과 24시간 함께 이기에 걸려오는 전화들에도 양해를 구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가 장기화되자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등장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감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왕래가 차단되어 아무도 만나지 않는 시간에서 에너지를 느끼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며 내가 나만의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는 내향성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내 안에 에너지가 고이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고 재미있게도 같은 조리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친구는 회사에 산후 100일 휴가를 낸 상태였는데 100일을 다 채우지 않고 한 달 만에 회사로 복귀를 했다. 살뜰한 시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니 걱정할 것이 없었던 친구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장 힘든 일 같다고 말했다. 밝은 목소리로 회사일보다 육아가 몇 배는 힘들다며 출근하니 살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말이 맞다. 엄마가 살아야 한다. 친구는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친구는 지금도 한결같이 열심히, 기쁘게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야무지게 육아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주변에 육아를 도와주실 분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 아이를 봐줄 수 있다고 해도 내 아이는 내가 키웠을 것이다.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꿈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구가 마음속 깊이 가득했지만 나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마냥 함께 하고 싶었다. 육아를 일 순위에 두고 나는 오랜 시간 육아에 몸을 담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가장 행복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을 뒤로하고 내 일에 두각을 나타내므로 행복할 엄마가 아니었다. 각자 자기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느림보 걸음을 택했고 많은 기회와 선택들이 내 앞에 있었지만 난 참 더딘 길을 택했다. 엄마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과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함께 한 것이 내게 있어 최상의 선택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이제 아이들이 초등학생들이 되었고 이제는 나의 길로 걸어가야 살 수 있는 엄마라는 것을!
어느 날 살림꾼인 아는 동생이 전화를 했다. 동생은 흥분된 목소리로 자기가 왜 이렇게 힘든 줄 알겠다며 김유라 TV에 김유라 작가처럼 자기도 집 치우는 것을 뒤로하고 난장판이 돼도 처다 보지도 않기로 했다고 했다. 안 치우니 시간이 나고, 며칠 안 치워도 별일 안 나는데 자기는 왜 그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시간에 자기 책도 읽고, 아이들 책 읽어 주니 너무 좋다며 신이 났다. 그랬던 동생이 2주 후에 흘러내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자기 못 살겠다는 것이다. 집이 지저분하니 아이들한테 화를 더 내게 되고, 아이들 잘 때 손에 책을 들고 있지만 집안일들이 눈에 거슬려 책에 집중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너답게 육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다.
여기저기에 답이 있지 않다. 정말 우리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다면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 나를 뒤로 하고 달려온 육아는 결국 아이들에게도 좋은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아의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해한 만큼 육아에 있어서도 안정감과 만족이 있고 그 안에서 장거리 마라톤인 육아의 길을, 건강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마음과 몸을 바라보고 보듬는 시간들을 세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