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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사춘기
시기에는 많이 안아주세요

 

어제는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소리를 높이고 재워서,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한 글귀가 계속 마음에 맴돌고 있다. 지금은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글귀이지만 글귀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바로 ‘일곱 살, 사춘기 시기에는 많이 안아주세요.’라는 글귀이다. 세 딸이 여섯 살, 네 살, 한 살 시기에 읽고 기억해 놓은 이 글귀를 요즘 계속 떠올리고 있다. 그 책을 읽은 당시만 해도 사춘기는 알겠는데 '일곱 살? 왜일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물음에 답은 다 찾지 못했지만 한 줄 마법주문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 시기였던 것 같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동생을 둔 큰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우리 집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동생들의 아가 신들 옆에 놓여 있는 큰아이의 신발이 너무나도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와! 이제 우리 집에 이렇게 큰 신발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신기함에 계속 서서 한참을 보고 있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나는 그 신을 막내가 물려받아 신을 때쯤 깨달았다. 여섯 살 아이의 신발은 참 작고 작았다는 것을! 큰 아이가 신었을 때는 동생들 신 사이에 정말 큰 신발이었는데 지금 보니 아빠, 엄마, 언니들 틈에 놓인 그 신발은 너무나 작았다. 그때쯤 ‘큰 아이도 아직 어린데 엄마가 너무나 다 큰 아이처럼 대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딸은 뱃속에서부터 엄마랑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랐다. 그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게 언어를 구사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는 딸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 아이 같지 않게 느꼈던 것 같다. 거기다 큰 딸 밑으로 네 살, 한 살 동생들이 있었으니 더 큰 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글귀 덕분에 의젓하게 보이던 큰 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자주 안아 주었다. 왜 일곱 살 아이를 많이 안아주어야 하는지 답은 다 알 수 없었지만 다 알고 하기엔 너무 늦어 때를 놓칠 수도 있으니 그냥 많이 안아 주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또 안으면서, 일곱 살의 큰 딸과 시간을 보내면서 왜 안아주어야 하는지 답들을 채워갔다. 


 어느 겨울 너무 추운 실내에서 있었던 일이다. 온풍기도 꺼진 실내 공간에서 나는 오리털을 입고도 추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큰아이가 외투도 입지 않고 친구들과 "나 잡아봐라"를 하며 발발발 뛰어다녔다. 추우니까 옷을 입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괜찮다고 하며 뛰어다녔다. 저렇게 뛰어놀다가 갑자기 훅 추워질까 봐 옷을 입어야 한다고 뛰는 아이를 잡았다. 옷을 입자고 하니 아이가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엄마 몸이 아니잖아요. 난 춥지 않아요. 내가 더 잘 알아요." '이제 이런 말도 하는구나.'싶어 속에서 '풋'하고 웃음이 났다. 또 맞는 말을 하는 딸 앞에서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추울 것 같으면 네가 입어. 네 몸은 네가 잘 아니까" 그때가 딱 일곱 살이었다.  

         

딸들 어릴 때 비 오는 날 우산 속 모습. 세 딸!! 엄마가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첫 딸을 키우면서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너무 예뻐서 내 몸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우리 딸이 이 마음을 다 알까?  모르겠지.’ 딸을 보며 혼자 가져 보는 생각이다. 6학년이 된 딸을 보고 있으면 정말 엄마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일곱 살, 많이 안아주었던 큰 딸을 이제 다시 많이 안아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엄마! 엄마 마음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건강하게 커가고 있다는 증거이겠지!


 큰 딸은 2차 성징과 함께 건강하게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일곱 살이 자아를 찾아가는 첫 발 돋음이었다면 이제는 자아를 찾기 위해 박찰을 가하고 있다. 자기의 주장도 많아지고 동생들과 왈가닥처럼 놀다가도 조용히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딸이다. 딸을 보면 아이와 어른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같다. 딸도 자기가 '사춘기'인 것 같다며 왜 이렇게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맑았다 개었다, 왔다 갔다 하는 딸로 인해 엄마의 마음도 엎치락뒤치락이다. 여자 넷이서 코로나 시기, 한 공간에 모여 무척이나 부대끼는 시간들이다. 큰 딸도 생각이 통하는 또래 친구들과 마음껏 얘기도 나누며 해소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말 안 통하는 동생들이라며 불만이 가득하다. 하루 종일 실랑이가 끝이지 않는다. 엄마 눈에는 가장 분위기를 뒤엎는 장본인이 큰 딸처럼 보이는데 정작 큰 딸은 이것저것 못마땅한 것도 많고, 불평할 것도 많다. 이런 딸을 보는 나도 속이 편할 리가 없다.    

  

 화가 많아진 딸에게 엄마의 더 큰 화로 덮어버리고 난 후, 내내 높아진 소리만큼 내 마음은 저 밑에 내려앉아 있다. 마음이 내려간 자리만큼 생각도 많아진다. 그렇게 조용히 생각을 하다 보니 어디선가 다가와 백허그를 하고, 소녀 감성으로 자신이 쓴 연애소설을 읊어주는 딸이 떠오른다. 엄마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깊은 곳에 아직도 엄마의 온기를 찾는 딸이 보인다. 나는 이제 그런 딸에게 다시 한번 안아줌의 옷을 꺼내 입혀 주려한다. 엄마가 딸의 성장을 응원한다고 찐하게 안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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