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헤르만 헤세-
책을 읽어 가다 잠시 멈추고 창 너머를 보게 됩니다.
'나무만큼 살아야 긴 호흡으로 호흡할 수 있을까?'
전 실제로도 호흡이 긴 편은 아니에요. 노래를 하다 보면 호흡이 항상 짧아 아쉽다 하지요. 그래서 긴 호흡으로 노래하는 사람은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지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나무의 호흡이라니! 번접할 수 없는 클래스를 만나고 그 거대한 대상 앞에서 취하게 되는 행동은 멈춤입니다.
책을 읽어가다 해볼 만한 것 같은 일이나 해보고 싶은 일들을 만나면 밑 줄을 쭉쭉 긋게 됩니다. 책에서 만난 동력이 나로 하여금 몸을 움직여 밑줄을 그을 수 있는 힘을 주지요. 그리고 그 행동들이 내 것이 되기를 바라며 계획도 세워보고 적용점을 적게 하지요. 그런데 이렇듯 번접할 수 없는 글귀를 만나니 멈추고 잠잠하게 됩니다. 감히 신났다고 무엇을 계획하거나 결심을 쓰지 못하고 그저 숨을 고르게 되지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딸들보다 오랜 삶을 지녔는데 그 편차 만이라도 긴 호흡과 평온한 생각으로 인생을 말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딸들 앞에서 여유로운 호흡으로 "딸들아 인생은 말이야~"라고 말해 주고 싶은 엄마도 항상 매 순간이 처음 걷는 길이라 녹록하지만은 않습니다.
나만 꾸미고 나만 챙기면 되는 여자는 엄마가 되어 가정을 섬기는 손길이 됩니다. 이제 나 혼자가 아닌 챙겨야 할 남편이 생깁니다. 한 가정을 이뤄가며 "그 흔한 삼시 세 끼가 이놈의 새끼"가 되어간다는 말처럼 살림과 애증의 관계가 되어갑니다. 어느덧 삼시 세 끼에 조금 적응해 살림을 알아가나 싶으면 이제는 육아라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세상이 열립니다. 첫아이를 낳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며 또한 세상 경험해 보지 못한 트레이닝을 경험합니다.
둘째는 좀 나으려나 하면 아이 둘의 엄마는 또 처음입니다. 거기다 첫째 때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둘째 아이는 또 다른 인격체이고 엄마도 몇 년 전의 그 엄마가 아닙니다. 거기다 셋째, 이제는 육아의 달인까지는 아니어도 남들 말하는 것처럼 셋째는 거저 키운다는데 조금은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셋째는 그 누구보다 존재감이 또렷한 아이가 태어나 자라 갑니다. 그리고 엄마의 몸은 셋째 아이만큼 낯섭니다. 이런 몸상태는 또 처음이네 싶지요. 낳고 회복하는 모든 과정부터 키우는 모든 과정에 엄마는 여유를 덧입는 것이 아니고 방임을 두릅니다. 체력의 한계와 인내력의 한계들을 맞닿게 되지요. 엄마는 '인생의 배움 내려놓음'이라 쓰고 '방임'이라 읽습니다.
몸으로 뛰어다니는 아이 때가 지나면 좀 나으려나 했는데 인생 선배님들의 말씀이 딱 맞습니다. "아이들 몸이 크면 엄마 몸도 고생에서 벗어나 좀 쉴만한데 그때부턴 맘이 고생해." 이제는 새로운 관문의 문이 열립니다. 사춘기 엄마는 또 처음이네요. 물론 아이들이 크니 엄마는 시간의 여유도 생기고 몸은 편해져 가요.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도와줄 수 있는 일도 많아졌지요. 그런데 엄마는 마음으로 많이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네요.
그리고 아이들을 조금 키웠다 싶으니 그간 아이 키우느라 쉬고 있던 나 키우기가 바빠집니다. 나도 아이들과 놀고 싶은데 아이들의 눈을 더 바라보고 싶은데 엄마는 sns와 놀아야 하고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맞추며 뒤통수를 보여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네요. 또한 인생을 긴 호흡으로 말해주기엔 엄마의 호흡도 늘 바쁘네요. 인생을 살아내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겠지요. '헉헉' 호흡하고 있지만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긴 호흡의 나무를 동경한다는 것은 나 또한 그 호흡을 닮아갈 거라는 것이겠지요.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요. 그래서 나무의 호흡 앞에, 자라고 있는 예쁜 딸들 앞에 하염없이 아쉽고 부족한 마음에 안타깝지만 심호흡 한번 하고 '으라챠챠'를 외치려 합니다. 나무의 세월을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나의 짧은 호흡과 갈팡질팡하는 생각들에 대해 조금의 여유를 두려고 합니다.
나무를 보고 그 거대한 존재감안에 담긴 평온한 호흡을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이 함께 평온해져요. 이 멈춤에서 나무의 호흡을 따라 하는 따라쟁이 엄마는 딸들에게 조금은 더 여유 있는 호흡을 하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소중한 딸들에게 딸들보다 오래 산 세월만큼이라도 조금은 더 평온하게 긴 호흡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