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한 달 만에 재개된 역사 답사!
우리 답사는 그동안 특정한 테마를 정해 진행됐다. 공주·부여는 백제 유적, 전라남도는 수탈과 항쟁의 역사. 그러나 이번의 강릉 ·삼척 ·영월 지역은 특별한 주제나 공통점 없이 정해졌다. 이유는 하나, '강원도는 여름에 덜 덥겠지?'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7월 25일, 아침부터 날이 뜨거웠다. 어김없이 YG쌤의 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우리는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점심 식사를 했다. 메뉴는 초당버거. 강릉은 특히 젊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그런지 소위 말하는 '힙한' 식당과 카페가 많았다. 초당버거와 큰 콜라 한 잔은 당시 유행하던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속도로 빠르게 우리 입에서 사라졌다. 식사 후 차로 돌아가려는데 이번에는 순두부 젤라또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젤라또와 초당 명물 순두부의 콜래버레이션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김치 피자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로서는 안 먹어볼 수 없다! 그렇게 순두부 젤라또까지 먹고 나니, 이거 이러다가 먹기만 하는 답사가 될지도 모르겠단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움직였다.
부랴부랴, 강릉을 대표하는 명승지 경포대에 도착했다. 경포 호수를 내려다보는 이 누각은 정철의 관동별곡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철에게만 예쁜 곳은 아니었나 보다. 누각 여기저기에 임금들의 어제시와 명사들의 글들이 걸려있다. 한자에 일가견이 있는 MZ쌤은 열심히 읽어 보았지만, 한자에도 약하고 시력도 약한 나는 현판을 그림처럼 바라보다 내려왔다..
다음 장소는 선교장.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 이후로 후손들이 쭉 이어 살며 가꿔온 명문 고택이다. 보자마마자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사극 촬영지로도 많이 쓰였는데 특히 내가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흘리면서 봤던 공주의 남자 촬영지이기도 했단다.
고택 곳곳에 꽃이 풍성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롱나무꽃이 잔뜩 있어 가슴이 또 설레온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뙤약볕에 이어 엄청난 습기의 공격. 안내 해설사분이 계셔서 쫓아 다니며 나름 열심히 들었지만 어항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생리까지 터졌다. 여름 답사에 생리는 너무하잖아.. 아랫배가 싸하게 생리통이 시작되면서 내 눈에는 별 게 다 짜증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이런 게 있다. 사랑채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세워줬다는 러시아식 발코니가 있다. 경관을 몹시 깬다고 생각했다.
왕족의 후손이 살던 집에 난데 없이 러시아 공사관이 왜 나왔는가? 이 집은 보통 집이 아닌 것 같다. 김구가 남기고 간 글도 있고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하던 태극기도 보관하고 있다. 중경 임시 정부에 후원금도 댔다고 하니 진정한 명문가였던 것이다.
돈이 많거나 유명하다고 해서 명문이 아니라, 이렇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잘 실행하는 가문, 철학과 소신이 있는 가문이 진정한 명문가라는 생각을 하며 강릉에 있는 또다른 명문가를 향해 이동하였다.
바로 강릉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한 오죽헌이다.
예전에 왔을 때도 강릉 시내의 모든 택시가 여기 다 몰려있구나, 싶을 정도로 붐볐는데 한여름 평일인 오늘도 마찬가지. 하긴 오천원과 오만원의 주인공이 계신 곳이니 와보지 않을 수 없는 곳,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율곡 이이가 탄생한 방까지 잘 재현되어 있다. 초천재가 태어난 곳이라 결혼도 안 한 몸이었지만 일단 기를 받아 두었다. 그런데 그 옆방에는 신사임당의 시가 전시되어 있어 읽으며 코끝이 찡해졌다.
읽으며 울컥하고 돌아서니 MZ쌤, YG쌤과 눈이 마주쳤다. 모두 같은 심정을 공유했다는 표정으로 끄덕끄덕했다. 조선의 여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린다. 오죽헌을 둘러 보며 우리는 '율곡 이이'가 아니라 '율곡 신이'였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며, '현모양처'로만 기억되는 오백 년 전의 뛰어난 한 여성을 그런 식으로 위로하였다.
오죽헌 내의 전시관에는 이런 저런 전시가 있었다. 특히 영월 지역에서 발견된 오백 개의 '나한'이 독특했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서, '수행 끝에 번뇌가 소멸되어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일컫는 불교 용어이다. 조각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귀여웠다. 전시관도 어두운 가운데 잔잔한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려와 감상하며 함께 해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도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숫타니파타의 구절. MZ쌤은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걸 알고 불러서 찍어 주었다. 이번 답사에서도 난 무소의 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