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알찰 수가 없는 남도 답사의 마지막 날이 밝아왔다. 매일 이만 보 이상을 걸었고, 몇달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존재들과 살과 숨을 부대끼며 이틀 밤을 잤다. 답사는 신기하게 뒷날로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갑자기 끝나 버린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영화1987의 촬영지, '연희네 슈퍼'
영화의 끝부분, 신문에 실린 이한열 열사를 보고 슬프게 울며 달려가던 연희, 그 길목마다 흩날리던 태극기와 애국가.
'1987'은 나의 최애 영화 중 하나이고,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말이지 수백 번은 본 것이다. 그 촬영장 앞에서 사진은 당연히 필수!
슈퍼는 이제 관광지화 되어서 세트장처럼 아예 그 시대를 재현해 놓은 공간이 되었다. 안내 해설사 분도 있다. 1990년대 생인 나는 1987년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슈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반가웠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순간들에 감사하며 방명록까지 남겼다.
그리고 차를 달려 나주로 건너 왔다. 제목엔 나주가 없는데 갑자기 나주는 왜 갔느냐? 왜 갔겠느냐. 남도 내려왔는데 오리지널 곰탕은 당연히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 목적은 나주곰탕이었다. 그런데 간 김에 둘러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 초 학자 신숙주의 고향이 나주였다는 사실! 마을에 신숙주 한글 고샅길이라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복원이 완료되지 않아 문만 있지만 여러 역사적 순간을 간직한 나주 읍성도 들여다 보았다. 여기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농민군이 패배한 전투이다. 어느 쪽이 졌어도 슬프다. 관군도 농민군도 모두 이 땅의 백성이었으니. 누각에 서서 농민군을 내려다 보는 관군의 심정에 이입해 본다. 공무원이라 관군에 이입했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나주읍성을 떠나 하마비가 생생하게 남아 앞을 지키는 나주 향교로 왔다. 신기한 게 하마비가 있는 쪽은 잠겨 있어서 입구가 아니었고, 옆쪽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출입문이 작아 보였는데 들어가니 꽤 규모가 컸다. 이 향교의 역사를 자랑하듯, 오래된 나무를 치료하는 나무의사 분들도 보여 신기했다. 우리는 곰탕을 얼른 먹고 싶었기 때문에 얼른 보고 나가려고 했는데, 관리를 하고 계신 문화 해설 선생님의 눈에 띄어 버렸다! 덕분에 향교의 역사부터, 금성산 봉우리를 딱 볼 수 있는 각도에 위치한 대성전의 원리 등 그냥 모르고 지나갈 뻔한 묘미들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퇴임 후 늦은 나이에 시작하신 일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진심으로 설명해 주시는지 내용뿐 아니라 열정과 사명감과 삶의 재미 모두를 함께 전달받은 시간이었다.
헤어지기 전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다가, 해설 선생님도 기억하고 싶어 함께 셀카를 찍자고 제안했다. 모두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 포토존에는 다음의 문장이 꾸며져 있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나주곰탕기와집'에서 곰탕을 정말 맛나게 먹고, 서울로 배달 주문까지 시켜놓은 후 다시 목포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참 많은 수탈을 당했을 이곳. 목포 시내가 다 들여다보이는 높은 곳에 지은 일본 영사관은 근대 역사관으로 탈바꿈하였고, 목포에서는 그 수탈과 유린의 잔혹사를 짓누르듯 소녀상을 그 앞에 앉혔다.
남의 것을 약탈하고 강탈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권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람이 사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목포진 역사공원과 소년김대중 공부방까지 알뜰하게 눈도장 찍고, 목포역 근처 유명한 빵집 코롬방제과점에서 빵을 좀 사들이고, 일제의 요사스런 취향이 잔뜩 묻은 옛 동본원사에서 민주주의 항쟁 시 회의장소로 쓰여 유적지로 탈바꿈한 중앙교회 터까지 들리고, 이렇게 우리의 2박3일 남도답사는 마침표를 찍었다!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민중가요를 참 좋아한다. (물론 이 노래에서 말하는 '남도'는 전라남도가 아니라 제주도이지만.) 수탈과 차별을 받아 온 이 땅의 역사에서 나는 온정과 의기를 느낀다. 굴하지 않는 그 꿋꿋함에 위로를 받는다.
역사교사로서 살아갈 나날들에 있을 다양한 순간에서, 여기서 받은 힘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삶이 이땅의 지난 역사에도 조그마한 보탬이 되어 가길 바란다.
나주향교 안내 책자에 있는 글을 실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 속담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어요.
잘 생기고 곧은 나무는 잘려 요긴한 목재로 사용되고 굽고 못생긴 나무가 남아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지요.
굽은 소나무처럼 나주에 남아 나주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역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
나주 지킴이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