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의 다음 여정지, 대흥사.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많은 말사(末寺)를 관리하는 절이니만큼 정말이지 엄-청 크다. MZ쌤이 자꾸 대기업이라고 얘기해서 웃겼다. 대기업의 위용을 보여주듯 입구에서부터 어마무시하게 생긴 장승들이 나를 노려봤다.
대흥사의 대웅보전에 현판이 몇 개 걸려 있다. 왼쪽에는 이광사의 글씨, 오른쪽에는 김정희의 글씨. 여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추사 김정희가 친한 스님에게 이광사 글씨체는 별로니까 현판 떼 버리고 자신의 글씨체를 붙이라고 했다는 게 있다. 우리는 '추사가 또'라고 혀를 찼지만.. 추사체가 예쁘긴 하더라. 가서 한 번 보고 판단해 보시길!
대흥사에서는 고명한 스님 세 분의 사당을 모셔 두었다.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 등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분들이다. 그래서 왕이 '표충사'라고 현판까지 내려주었는데 그 왕이 바로 정조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고 나와 함께 정조에 홀릭한 엄마가 생각나서 얼른 연락을 드렸다.
대흥사를 나오며 '당연히' 들린 상품점. 불교 상품은 단순히 구매 욕구를 자극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을 담고 있어서 좋다. 벗은 떠났지만 입 안에 남은 차향처럼, 대흥사를 떠나면서 우리도 맘속에 남을 기억을 안았다.
뜨거운 햇볕 아래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설명문 하나 하나 읽으며 돌아다니던, 계곡에 내려가 돌다리를 건너 보던, 셀카봉을 설치해두고 호다닥 달려가 단체 사진을 찍던 기억들.
그리고 차를 달려서 남해 가까이에 접근! '바다동산'이라는 횟집에서 기억보다 더 오래 남아 내 뼈와 살이 될 식사를 했다. 어느덧 세네 시라 점심이라기엔 좀 늦었는데 배고픈지도 모르고 답사를 한 것이다. 곡기가 입 안에 도니 그제야 허기가 돈다. 마구 먹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지지 않고 상다리 부러질 만한 식사를 대접하셨다. 멋진 사장님이었다!
부른 배를 끌 수 있도록 우리는 이어서 바로 부지런히 땅끝마을로 향했다. 대학생 때 해남 땅끝마을 오는 것을 버킷리스트로 세웠는데, 답사를 통해 또 버킷리스트를 이뤘다!
서해, 동해랑은 당연히 다르고 제주도에서 보는 바다와도 다른 남도의 끝.
김 양식장인데, 이순신 덕후인 나는 판옥선으로 진을 펼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별 터무니 없는 이 헛소리 덕분에 우리는 다음의 답사 테마도 정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 승전의 기록을 따라 가기'
원하던 것을 하나 하나 이뤄가는 이 순간이 너무 벅차게 행복했다. 땅끝에 서서 열심히 가슴에 이 순간을 새겼다.
숙소와 식당이 있는 목포로 되돌아가는 길에 일몰이 너무 예뻐서 잠깐 보자고 멈췄는데, 거기서 HY쌤이 유기견을 발견했다. 너무나 순하고 귀엽고, 생긴 것도 예쁜 이 강아지는 우리 집 강아지를 닮아서 한층 맘이 아파왔다. 우리가 종종거리며 강아지를 떠나지 못하자, 낚시가게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여름만 되면 50마리 정도는 버려져 떠돈단다. 여기까지 기껏 여행와서 소중한 생명을 버리는 쓰레기같은 놈들에게 대를 이어 천벌이 내려지길 간절히 바랐다.
강아지를 차에 태워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나 어쩌나, 이런 상황을 실제로 접한 건 처음이라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YG쌤이 군청에 전화하셔서 보호단체로 연계를 부탁하셨다.
(몇주 후 HY쌤이 보호 중인 유기견 사진에서 그 아이를 닮은 강아지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귀여운 강아지가 좋은 주인을 꼭 만났기를...)
강아지 일로 해남에서 발목이 잡혀 계획보다 늦게 목포로 돌아왔다. 오늘만큼은 진짜 일찍 먹고 일찍 자자고 대결이라도 하듯 서로 떠들었다. 가기로 한 식당에도 시간이 늦어 식사를 픽업하여 숙소에 가지고 왔다. 초무침과 바지락죽을 정갈하게 세팅하고,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파인트 통도 하나 포장해서 옆에 둔 후 경건하게 탁자에 둘러 앉았다. 많은 추천을 받아 찾아간 '해촌'이라는 식당의 음식들은 정말 눈이 커지도록 맛있었고, 우리는 약속대로 일찍 잤다.
새벽 1시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