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점점 뜨거워지듯 답사도 달아오른다. 세 번째 목적지는 강진의 유명한 곳 중 하나 다산초당이다. 한반도 역사상 초천재 리스트를 꼽는다면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에 머문 곳이다. 초당을 보며, 복잡다단한 세상사에서 한발짝 떨어져 차를 다려 마시며 그 세상을 계속 고찰해 보았을 다산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초당의 방 한 켠에는 ‘보정산방’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다산을 흠모했다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추사는 원래 남도 답사 목적에 없었는데, 글씨체 이슈로 여기저기 등장하게 된다.
초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바다를 앞두고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자체는 나중에 지어진 것이지만, 이 위치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을 그리워했을 거라고. 형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며 눈물지었을 위치에서 우리는 막 경망스럽게 브이하고 컨셉 사진 찍고 그러긴 했는데.. 아무튼 정약전 얘기를 하니 관련 영화 자산어보를 보며 받았던 깊은 감명이 새삼 떠올랐다. 다산 정약용뿐 아니라 형 약전도 정말 똑똑했다. 어머니 핏줄인 해남 윤씨네도 그렇고, 천재는 왜 저 집안에 몰려 있는지!
유배온 다산이 차를 함께 나눈 벗, 혜장 스님을 만나러 백련사에 매일 다녔대서 우리도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초당 뒤켠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했는데... 이게 매일 갈 길인가...? 그만큼 애틋했나... 선인들에 비해 우리의 체력과 담력이 터무니없이 작은 것일까 다양한 생각이 드는 길이었다.
그러나 땀범벅이 되어 길을 함께 걷다 보니 고되지만 한층 돈독해진 걸 느꼈다. 우정의 길이 맞군.
우정의 길을 건너 당도한 백련사를 짧게 구경하고 차를 달려 해남으로 넘어왔다. 강진은 정말 고요한 시골 같았는데, 해남은 훨씬 번화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맛있기로 전국에 유명하다는 고구마빵이 있어 우리는 아주 바리바리 사들였다. 디저트도 샀겠다, 이제 저녁을 먹고 딱 숙소에 가면 되는데 알아둔 식당이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런데 그곳만 닫은 게 아니라 꽤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아 두었다. 아닌 밤중에 낯선 해남에 떨어진 우리는 한참을 헤매다가 9시가 다 되어서야 삼겹살과 키조개를 파는 맛집을 만났다. 헤맨 끝에 먹는 늦은 저녁이 꿀맛이었으리란 건 당연한 얘기.
늦은 저녁 소화하는 데는 당연히 밤을 달리는 대화가 최고다. 내일 일정이 빡빡하니 12시에는 자자던 계획은 증발되고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답사 장소에서 느낀 점, 역사의 의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요즘 세태에 대한 걱정 등 끝없는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코를 잔뜩 골며 곯아 떨어졌다가 역시나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도 날씨 좋다! YG쌤은 가장 늦게 주무시는 것 같은데, 항상 우리보다 일찍 일어나 깔끔하게 준비를 마치시고 우아하게 아침의 여유를 누리신다. 2등은 보통 나. 더 자고 싶지만 답사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용모 치장에 시간을 쓰기 때문에 꼴찌로 일어나면 곤란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MZ쌤. 그러나 라이벌이 생겼다. 그녀는 바로 게스트 HY쌤. 잘 자고 일어나서 빠른 준비를 마치는 또래 선생님들을 보니, 답사까지 와서 풀 메이크업을 하는 나의부지런함이 왠지 모르게 살짝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후의 답사에서도 항상 화장을 했다고.)
발코니에서 볕과 새소리와 날벌레를 즐기며 어제 잔뜩 사둔 빵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해남 명물 고구마빵 진짜 맛있네! 기념 선물로만 많이 사고 내 몫으로는 한 개밖에 사지 않은 것이 몹시 아쉬웠다.
첫 일정은 해남 두륜산 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한반도 모양의 강줄기를 볼 수 있다. 날씨도 좋고 피톤치드가 기분을 향긋하게 해주는 힐링 로드를 따라 걸어오르면, 전망대에서 남쪽의 바다와 섬들을 훤히 볼 수 있다. 멀~리 흐릿하게나마 한라산도 볼 수 있다고. 정말 남쪽에 내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려는데 사랑의 우체통이 있어서 굳이 또 했다.
비싼 옷, 비싼 가방, 비싼 취미 하나 없어도 내 월급이 잘 새어나가는 것은 보통 이런 곳이다. 그 순간, 그 장소, 그 추억을 떠오르게 해 주는 어떤 것들.
비장하게 엽서 한 장 받아 펜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좋은 사람들과 답사를 다니며 느끼는, 벅차오르고 행복한 이 감정들과 배운 점들을 잘 녹여내고 앞으로의 삶에 지침이 될 편지를 '며칠 후의 나'에게 잘 보내고 싶어 고민하는데 케이블카 도착이 임박하였다. 다급한 나머지 나는 또 좋아하는 구절을 냅다 적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