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백제유적 답사 후 우리들의 답사는 학교에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교무실마다 나눠드린 밤빵 덕분이었을까? 어쨌든 보기에 좋았는지 게스트가 생겼다. 같은 학년을 가르치는 중국어과의 HY쌤. 나와 동갑인 그녀는 냅다 찾아오더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도 답사 같이 가고 싶어요.”를 시전했다. 아직 알게 된 지도 두 달 정도밖에 안 된 데다가 과목도 다른데 함께 하고 싶다고 ‘먼저’ 얘기하다니? 그 적극성에 호감도가 팍 올라간다.
현충일이 있는 6월의 연휴 주간을 빌려 두 번째 답사를 기획했다. 장소는 강진, 해남, 목포. 통칭 ‘남도’
남도와 혈연, 지연, 학연 그 어떤 것도 없는 나지만 지명을 들을 때마다 울컥대며 차오르는 게 있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리라. 최대 곡창 지대로서 기득권에게 수탈을 당하며 쌓여온 뜨거운 울분과 항쟁의 역사, 권력자의 의도대로 차별에 냉대를 당하며 쌓여온 설움과 투쟁의 역사가 슬프다.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중요 사건들마다 빠질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초여름의 날씨를 무릅쓰고 남도를 선택했다.
출발 전날인 6월 2일 금요일 HY쌤과 치맥을 하며 새벽 2시까지 수다를 떨고 잤다. 그리고 3시간이나 잤을까, 벌떡 일어나 준비한 후 서울역으로 향해 6시 21분 KTX 탑승에 성공! 9시 10분에 목포역에 도착했다. 연휴 때마다 비가 쏟아지곤 했는데 이번 연휴는 그저 화창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우리 답사팀에 날씨 요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목포역에서 차를 빌려 강진으로 달렸다. 운전은 운전요정 YG쌤이 또 맡아주셨다. 첫 목적지는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천하 제일을 자랑하는 고려 비색! 당시 그 어떤 나라도 따라할 수 없는 제작 기술, 그리고 혼을 담아 만든 고려만의 청자.
우리가 열심히 구경하고 있으려니 입장권을 끊어준 분이 다가와서는, 영상실에 가서 본인이 나오는 영상도 시청하라고 추천하셨다. 입장권 업무만 하는 분인 줄 알고 장난을 치나 보다 했는데 진짜 나오더라. 알고 보니 도예가셨다.
박물관 부지에는 지붕에 무려 청자 기와가 얹힌 정자도 있었다. 계룡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는 고려 의종이 만들고자 했던 정자를 따라한 것이란다. 그냥 기와면 됐지 청자 기와는 뭐람. 백성의 궁핍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를 부리고자 한 권력자라, 그러니 나라가 엉망이 됐지!
청자 머그컵 만들기 체험도 있었다. 모르고 온 거라 시간대가 안 맞았는데, 그냥 하라고 해 주셨다. 이런 온정... 안그래도 남도에 가지고 있던 좋은 편견이 한층 강화된다! 빚어놓은 도기가 마르기 전 문양이나 글씨를 새기면 구워서 보내준다고 했다. 다들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림엔 영 소질 없는 나는 그냥 좋아하는 문장을 썼다.
좀 떨어진 곳에는 그시대 기술 그대로 지금도 청자를 생산하는 중인 강진요 1호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얼쩡거리고 있으려니 구경해보라고 하시며 엄청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시대 제작 기술은 지금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과 같은 거라는 찰떡같은 비유와 함께. 교과서에서, 책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살아 있는 공부를 이렇게 또 한다.
‘도반’이라는 이름의 정갈한 식당에서 산뜻한 절밥을 먹고 두 번째 목적지, 무위사로 향했다. 신라 진평왕 39년(617년) 창건으로 추정되는 천년 고찰이다. 국보 제13호 극락보전도 세월의 흔적이 주는 무게감을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은 어찌나 맑은지, 극락보전에는 현대미라고는 어찌나 없는지 실제로 천 년 전 신라 시대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이 맛에 역사 답사를 한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Z쌤과 HY쌤이 고등학교 동문이었다는 사실! 둘은 4년째 같은 학교 동료였는데 답사를 와서 그 사실을 처음 알고 한껏 반가워하였다. 나까지 또 셋은 대학 동문이기까지 하니 세상은 정말로 좁다.
역사적 사실 하나 배우면, 인생사 재미 하나 배워가며 우리 답사가 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