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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부여 (2): 검이불루, 화이불치

by 낡은용

눈을 뜨니 너무나 화창한 아침이었다. 약간의 불면증을 겪는 나로서는 이렇게 꿀잠을 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머리를 대자마자 잔 것 같다. 왕수다를 떨고 늦게 잤기 때문에 피곤할 법도 한데 평소보다 더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MZ쌤 왈 수면은 양보다는 질이라나. 본인은 램 수면 법칙에 따라 1시간 반 간격으로 자는 시간을 맞춘다고 한다. 정말 램 수면 덕인지 하여간 꽤나 상쾌한 컨디션으로 숙소를 나섰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이런 날씨를 좋은 날씨라고 하는 거구나. 사진 또 참을 수 없지.


소담스럽던 첫 숙소에서 짧은 추억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백제 역사를 향해 떠나본다.

둘째날 첫 번째 일정은 정림사지. 정림사는 미륵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터와 탑, 그리고 석불좌상만 볼 수 있다. 입장권을 사고 사지에 들어서자 넓은 공터에 탑이 우뚝 서 있다. 너무 난데없이 탑만 서 있는 느낌이라 어색할 만도 한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홀로 서 있어도 충분히 위용이 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탑이 겪었을 오랜 세월이 내게도 전해져오는 것 같은 울림이 있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탑에 글귀를 새겨놓았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찬찬히 둘러보니 탑의 네 면에 모두 적혀있어 그 포악함에 치가 다 떨렸다. 남의 나라여도 사람들의 혼과 얼이 담긴 작품은 보존해 주는 관용과 멋을 바라기에 그 시절은 너무나 옛날인 걸까?


정림사지와 인사하고 부지런히 국립 부여 박물관으로 향했다. 대형 관광버스가 주차장에 몇 대씩 들어서 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계속 한적했는데 부여 온 사람들이 다 여기 와 있었구나! 그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이것 때문이겠지, 백제 금동대향로. 1500년 전의 유물이 원형 그대로 발견된 것도 놀랍고,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가공할 만한 이 향로를 여태 교과서에서밖에 못 봤는데 드디어 실물로 접했다.

금동대향로 전시실은 위풍도 당당하게 따로 있었는데, 사람들이 북적북적 몰려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 앞에 서서 감상하는 동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파가 대폭 줄어들더니 마지막엔 거의 우리 셋만 남았다. 맘껏 보고 느끼는 걸 도와주듯.


말없이 몇분 간 들여다보며, 이걸 만들었을 백제의 어느 장인과, 이걸 땅에 파묻으며 숨겼을 백제의 어느 필부가 생생히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 잔상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눈을 감고 몇 번 더 새겨본 후 박물관을 나왔다.

그리고 이동한 곳은 공주! 서울에 첫 도읍을 정한 백제는 고구려에게 쫓겨 공주에 두 번째 도읍을 정했다가, 중흥을 꾀하며 부여로 옮겨간 것이었다. 우리는 부여를 먼저 갔으니 시대를 거슬러 백제를 쫓아가는 중이다. 공주답사도 식후경. 엄청 맛있는 해물 칼국수와 밤 묵사발을 먹은 후 배를 두드리며 공산성으로 향했다.


공산성은 공주에 도읍한 백제의 왕성이다. 한바퀴 빙 두르며 내려다보니 이 산은 참 높고 앞에는 물이 있는 게 적을 막기에 좋은 천혜의 요새였겠구나 싶었다. 고구려에게 수도를 잃었던 만큼 방어에 신경을 썼을 백제의 심정이 느껴진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 공산성에 조선 왕 인조도 피신을 왔단 것이다. 이괄의 난 때 일이다. 인조는 피난도 참 많이 다녔구나.

이렇듯 공산성은 꽤나 험준했다. 하지만 내 기준이다. YG쌤의 경우 산속에서 길 잃은 사람이 만나는 도사님의 포스로 날 듯 내려가셨고, MZ쌤도 척척척 잘 걸어 내려갔다. 나는 뒤에서 두 분의 걸음을 사진으로 담다가, 카메라마저 냅다 놓아버리고 좀 쉬었다.

마지막으로 송산리 고분군에 들러 무령왕릉을 봤다. 삼국시대 지어진 고분군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덤, 무령왕릉. 이 무덤 역시 몇 십 년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요히 천 년을 숨어 있던 무덤을 처음 발견했을 사람들, 무령왕릉임을 알고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단 걸 확인했을 사람들의 쾌감과 전율이 부럽다. 무령왕릉은 폐쇄되어 있고 다만 똑같이 재현된 모형을 박물관에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진짜 무령왕릉이 궁금하여 마지막까지 앞에서 기웃기웃 해 보았다.

교무실 선생님들, 가족들에게 선물할 밤빵까지 야무지게 사고 이렇게 우리의 첫 답사는 마무리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할 법도 한데 모두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빠르고 시끄러운 시대,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시대. 역사를 공부하는 길은 내가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임에도 자신이 없고 조급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답사를 다녀오니 마냥 행복하고 충만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우리땅 우리 역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알아가야 할 순간과 공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벗들과 함께할 수 있었기에.

그래서 우리는 돌아오자마자 다음 답사 계획을 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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