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1일 금요일. 대망의 첫 답사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 각각 백제의 두 번째, 세 번째 수도이다.
마한의 54국 중 하나로 건국되어 온조왕 이후 빠르게 성장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룬 한 나라였다. 초기에는 한강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삼국 중 가장 일찍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수도를 잃고 남하하였다. 남하한 백제는 웅진(공주), 그리고 뒤이어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명맥을 이어 갔다. 최강 고구려에 의해 수도를 잃고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중흥을 꾀했던 백제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전성기를 자랑했던 고구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에 비해 백제는 아무래도 존재감이 좀 덜하다. 그런데 그 애매한 존재감이 백제의 특색을 완성한다.
YG쌤은 정말 운전을 잘 하신다. 편안한 승차감, 적당한 속도, 대화에 빠지지 않는 적절한 리액션. 덕분에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을 때 부여에 무사 도착하였다. 백제유적도 식후경. 미리 추천받은 맛집에 들어갔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지 널찍한 식당에 손님은 우리뿐이다. 백제유적 답사의 첫 식사는 연잎밥. 뜨끈한 밥이 연잎에 포근히 감싸져 나왔다. 한 잎 한 잎 떼는 것부터가 맛있다. 감칠맛을 더해줄 생선구이까지 더불어 한 끼 뚝딱하고 나오니, 그새 날이 조금 저물어 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유적지 하나는 본다는 목표를 가지고 부지런히 움직여 도착한 곳은 궁남지. 별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미 날이 퍽 어두워져 있었다. 어둡기에 더 깊고 커 보이는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봄밤의 선선한 바람이 반겨 주니 연못을 둘러 그저 걷는 걸음마저 어찌나 즐거운지.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핫플레이스에 가면 두통만 얻어서 오지만 이런 델 오면 그렇게 극강의 하이텐션이 되는 나는 견딜 수 없이 신나버렸다.
“쌤들 우리 사진 찍어요. 저 이런 거 엄청 잘 해요!”
자칭 사진 구도 설정의 달인인 내가 나서서 부지런히 셀카봉을 설치했다. 손 흔들어 주세요, 하나 둘 셋.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궁남지에서 별도 보고 춘향이 그네도 타고, 함께 하는 첫 답사 사진을 남기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민박 업체를 이용하여 고른 숙소는 한옥이 모여 있는 동네에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단장한 한옥의 기와가 곡선을 이루며 어둠 속에서 우릴 반겨주었다. 꽤나 어둠 속이라 사실 우리 차는 둑방에 잘못 들어가기도 했지만, 무적의 드라이버 YG쌤이 안전하게 빠져나오셨다. 사실 무서워서 봐 드리겠다는 핑계로 차에서 내려 빠져 있었는데. 그 이후로 믿고 타는 YG쌤 차!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도 좀 샀는데, MZ쌤이 밤막걸리를 사자고 제안했다. 알코올 안 받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도 신이 나 동의했다. 씻고 나와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 짠! 하며 외치는 ‘수고하셨습니다.’에 캬 소리가 절로 따라 나온다. 하루 일정이 끝난 후 밤을 어떻게 보내자고 논의한 적이 없는데, 이후로도 자연스럽게 지역 특색이 담긴 술을 한 잔씩 하는 게 우리의 일정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밤의 꽃은 술이 아니라 대화, 아주 진지하고 진솔한 대화였다. 그러고 보면 사실 알게 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우리였다. 같은 학교 역사 교사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이렇게 여행까지 오게 된 것이 신기했다. 더 신기한 것은 대화가 정말 잘 통한다는 것이었다. 서른 살 이후부터의 인상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는 비슷한 생각과 취향을 가졌기에 인상만 보고도 통하는 사람이란 걸 느꼈었나 보다.
첫날 답사 후기, 직장 이야기, 역사 이야기부터 정치·사회·문화·종교를 아우르며 새벽을 달리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길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들이란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