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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거제·통영(1): 아픈 역사도 새기며 걷는다.

by 낡은용

2023년 10월, 가을이 완연한 날씨에 우리는 네 번째 답사를 떠났다. 장소는 부산, 거제, 통영. 지난 남도 답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바다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벌써 20년 가까이 듣고 있는 유구한 이순신 사랑. 사실 어릴 때는 드라마 속의 이순신을 좋아했고, 청소년기에는 자칭 역사학도로서 드러내기 좋은 우상으로서 존경했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외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경외심이라면 이렇게 애착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순신이 그 고통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어떻게 겪어내고 이겨냈을지를 떠올리다 보면, 머나먼 시대의 후손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다가가 위로하고 가까이서 응원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라에 충성했고 부모에 효도했고 백성을 사랑했고 불의에 분노했고, 가장 바르고 확실한 방법으로 이길 줄 알았던 완벽한 무인. 그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좀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남해 바다로 온 것이다!



10월 7일 무려 새벽 여섯시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김해공항에 내려 아침식사를 하니 여덟시쯤. 이 아침에 이미 3천보 가까이를 걸었다. 이번 답사에도 스페셜 게스트를 모셨다. 같은 학교 과학과 교사이자 YG쌤의 절친한 친구인 EK쌤. 우리 학교는 워낙 커서 나는 EK쌤을 이번 답사에서 처음 뵈었고, 그대로 2박 3일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럼 역시나 과목도 다르고 그간 알지도 못했던 분과 함께하게 된 이유는?

EK쌤이 나 못지 않은(?) 이순신 광팬이라는 YG쌤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좋아하는 사람 다 모여!


동갑인 나와 MZ쌤 사이에서(물론 MZ는 본인은 빠른년생이라 동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홀로 지내셨던 YG쌤은 또래인 EK쌤이 오시니 더 즐거우신 것 같다. 김해공항에서 차를 빌린 우리는 우선 부산진성으로 향했다.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가장 먼저 침략받고 함락된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부산진성의 정발, 동래성의 송상현을 필두로 성내의 관민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왜놈들마저 무덤을 만들어 그 충의를 기렸다는데, 그럼 쳐들어오지 말던가.

답사를 다니며 알게 된 건 많은 유적지에 해설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들의 눈에 잘 띄고 적극 호응을 보내기 때문에 바라던 것 이상의 풍부한 설명을 듣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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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설명이 마음을 울렸다. 성벽에 홀로 색과 감촉이 다른 기둥이 두 개 받쳐져 있는데, 다른 것은 복원되었지만 이것은 300여 년 전에 만든 그대로라 풍화가 되었는지 돌이 부들부들(?)하다. 그리고 두 개의 기둥 각각에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남요인후':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다.

'서문쇄약':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이다.


왜란을 겪은지 얼마 안 됐음에도 통신사가 오가며 일본의 문화에 아무렇지 않게 젖어드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하고자 세웠다는 설명. 일종의 세태를 바라보며 듣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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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는 조선통신사 역사관이 있다. 임명을 받고 내려온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하는 관문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관 내부에서도 우리는 해설사께 간택되었고, 통신사의 구성, 경로, 일정 등에 대해서 상세히 배웠다. 가는 장소마다 적극적으로 해설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감사한 일이다.

가장 인상 깊은 설명은 소동(제일 왼쪽 인형). 조선의 아이돌이라고 생각하라는데 통신사의 흥을 돋우는 가무 및 꽃미모 담당 소년들이다. 벼라별 존재들이 있었구나 싶어 뜨악했다.


부산개항장 거리로 건너오면 역사 유적 코스가 준비돼 있다. 부산진성을 수호했던 정발 장군과 그의 애첩, 가노 등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인 정공단을 시작으로 둘러보려다 예정에 없던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길가에 독립운동가 정오연 생가터라는 이름의 가게가 보였다. 정오연이라는 이름의 독립운동가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설명문을 읽고 있자니, 사장으로 보이는 할머님이 들어오라고 하신 후 적극 설명해주셨다.

나름 역사 전공자인데도 어린 나이에 큰 일을 하신 독립유공자에 대해 몰랐다는 게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겠지.

독립운동한 분들은 어떤 화질이든 그걸 뚫고 나오는 눈빛이 있다고, 가게 내부의 사진과 기사들을 보며 느꼈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보러 온 부산에서 일제강점기의 흔적도 보자니 일본에 대한 유감이 강화되었다..^^

안용복 기념관과 증산 왜성까지 이어서 보니 더 그랬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부산을 떠나 닿은 거제의 칠천량해전 전시관에서 그 유감은 극대화되었는데 일본에 대한 유감뿐 아니라 당시 조선 정부에 대한 유감이기도 했다. 칠천량해전은 삼도수군 통제사였던 이순신이 모함으로 끌어내려진 자리에 앉은 원균의 패전이었으며, 선조의 패전이었고, 개전 후 조선 수군의 첫 패전이자, 완패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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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조선수군이 어리석은 지휘관 때문에 무참히 수몰돼야 했던 유일한 전투 기념관을 보는 게 처음엔 괜히 속상했다.

그러나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좋았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이유가 상세하게 정리돼 있을 뿐 아니라(선조와 원균 때문입니다. 삐빅) 그 현장의 비참함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바로 밖에는 그 바다가 펼쳐져 있어 지형을 보며 공부하기에도 좋았고, 수백 년 전의 일이지만 바다에 잠든 수많은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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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조선 수군은 짱이야!!

빨리 이순신, 그 승전의 기록에 다가가고 싶었다. 답사 첫째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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