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으로 산다는 것 #6
1997년 4월 한보철강의 부도 사태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무리한 차입과 부정 대출로 한보철강은 부도났고, 몇 개월 후 IMF 사태의 전조가 됐다. 여기서 한보철강 총회장 정태수의 발언이 길이 남는 명언이 된다.
"자금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추가 자금 지원이 있었어도 몇 개월밖에 못 버텼을 거라는 임원의 검찰 진술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장과 직원의 관계를 '주인-머슴'으로 사고하고,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해도 되는 시절이었다. 23년 전엔 그랬다.
주인과 머슴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사에게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은 바로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이었다. 단순히 상사의 꾸지람 속뿐만 아니라 사장님의 훈시나 신년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아예 기업의 인재상이나 가치체계 안에 한 자리 차지하기도 한다.
정확히 '주인의식'이 뭔지 고민해보진 않았는데, 자주 듣다 보니 자주 말하게 됐다. '요즘 팀원들은 회사 생각을 안 하고 자기들 생각만 한다', '자율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질 않는다' 등의 언사가 주인의식의 부재 또는 부족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회사와 주인의식
주인의식이 도대체 뭘까. 우리 집과 나를 생각해봤다. 내가 내 돈을 들여 산 우리 집에서 주인으로서의 나.
우선 물건을 아껴 쓸 것 같다. 어디가 고장 나면 바로 달려들어 고쳐보려 할 것 같다. 더러워지면 청소기를 찾을 것이다. 이런 점만 있을까? 주인이니까 대충 어지르고 살아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치약을 쭉 짜서 써도 된다. 좋은 주인의식, 나쁜 주인의식 이렇게 둘로 나눠볼 수야 했겠지만, 어찌 됐든 주인의식이다.
주인의식의 양면
내가 팀원일 때 '주인의식'을 남발하던 그 당시 팀장들을 떠올려봤다. 아마도 그들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뉘앙스상으로는 '일 좀 빠릿빠릿하게 해라', '찾아서 해라' 정도였다. 그게 주인의식이랑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싶다.
2018년 한국상공회의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00대 기업의 인재상 중 주인의식은 5순위를 마크했다. 기업들은 주인의식을 가진 인재를 무척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따라붙는 의문점은 '주인이 아닌데,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다. 이건 마치 강아지에게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야옹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나간 얘기인가. 직원의 주인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주인 대접을 해주자면서 권고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 기업정보를 최대한 공개하자
- 성과가 나면 공정하게 분배하자
- 제안을 장려하고 의사결정 참여를 보장하자
불행히도 위와 같은 원칙을 따르는 회사도 적을뿐더러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직원들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관리자가 얘기하는 주인의식은 '열심히 일하는 똘똘한 머슴'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의식은 허상이다. 따라서 주인의식을 고취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솔직할 필요가 있다.
직원은 주인이 아니다
회사와 직원 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머슴'을 운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현재 시가총액 10위 기업들의 인재상에는 '주인의식'은 없다.
회사에 입사할 때 직원은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이것만 바로 떠올렸다면 회사-직원 간의 관계는 '계약'관계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사회와 비교해 우리나라는 '계약'이란 개념이 약하다. 계약서대로 따지면 쫀쫀한 인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직원은 무엇으로 회사와 계약을 했을까. 직원은 근로시간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급여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계약은 평등한 관계의 결과물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계약을 맺고 근로와 급여를 교환한다. 이런 까닭에 나는 회사와 직원의 관계를 '파트너십'이라고 부르고 싶다. 파트너십이란 파트너 양방이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결과로 권리를 행사하는 관계다. 이런 맥락에서 회사는 더욱 수평적일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현재 대다수 기업의 사업부제 조직은 1930년대 미국에서 형성된 과거의 유물이다.
계약을 통한 파트너십
회사와 직원은 파트너십이라고 하면, 직원들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의식은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본다. 파트너라면 파트너답게 일하고 성과를 당당히 가져가는 프로정신이다. 회사라는 대의 앞에 개인이라는 소의를 굴종시키라는 소위 '주인의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주인의식은 조직이 강요하고 강제하는 관점이라면, 프로정신은 더자발적이고 참여적이다. 팀장이 팀원을 질책할 때도 후자를 택할 때가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회사'를 떠나 '본인' 자신의 관점을 건드리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팀과 프로정신
예전 안타까운 팀원 하나가 있었다. 분명 발전 가능성은 있는데, 성과나 실력의 향상 정도가 좋지 못했다. 여러차례 면담 끝에 원인에 접근할 수 있었다. 조직 내에서 입사 동기들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불안하다고 했다. 그런 불안이 분발의 촉매제 역할을 해줬으면 좋으련만, 의지가 약한 상태에서 작은 노력들은 단시일 내에 실패로 귀결되고, 작은 실패들이 쌓여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여러 얘기 중 결과적으로 가장 효과 있었던 말은 '남'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남과의 비교에 휘둘리는 사람은 애초 자신의 목표가 없거나 불분명해서 그렇다. 비교하지 말라고 하기보단 본인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비교도 좋은 동기부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입사 동기들은 네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야.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가 중요하니. 정작 문제는 네 목표가 없는 거야. 그러니 길이 안 보이는 거고, 당연히 옆이나 두리번거리겠지."
아쉽게도 그 직원은 다른 부서로 전속이 됐다. 그러고 얼마쯤 나의 조언이 좋은 영향을 줬다면서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지금은 그 부서의 팀장으로 승진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