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으로 산다는 것 #10
종종 직장인 대나무 숲 '블라인드'를 본다. 정보를 얻는 것도 있지만, 나 같은 팀장들은 무얼 고민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그러다 아랫글을 최근에 발견했다. '카리스마'로 고민하는 어느 팀장의 글이다.
제목은 '여자 팀장'이지만 성의 차이가 중요하진 않다. 원래 조직 안에서 성별과 나이는 비판을 위한 좋은 구실로 쓰였다. 아직도 회사에는 '여자라서...', '어려서...'라는 편견과 조롱이 남아있다. 부침이 많았던 우리네 근현대사 동안 '고령'에 '남자'들이 지배층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성별이나 나이가 핵심은 아닐 것이다. 고로 그냥 팀장의 고민으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 본다.
카리스마 없는 팀장
'카리스마'라고 하면 직원들의 동의를 끌어내는 기운이나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경험한 카리스마 있던 상사는 컨설팅 사업본부장(이사)이다. 준수한 외모에 좋은 학벌, 누구나 다 아는 S사 출신. 사업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암기력은 대단했다. 2백 페이지가 넘는 제안서를 첫 장과 끝 장 빼고는 화면 보지 않고 줄줄 발표했다. 고객사 담당자들 입이 떡 벌어졌다(하지만 이는 묘한 반감을 불러오기도 했다).
워낙 카리스마 넘쳐서 그랬나? 나는 그가 다녔던 경영대학원 숙제까지 대신해주곤 했다. 직접 업무 지시를 받은 적도 적었고, 회식 자리도 많지 않았다. 불행히 회사는 몇 개월을 버티지 못했고(닷컴 버블), 데리고 있던 컨설팅 그룹을 패키지 딜로 이직을 하게 주도했다. 나는 그 대열에 합류하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 것 같다. 1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그 OB 모임을 하고 있는데, 카리스마 본부장은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따로 만났던 OB 중 형 하나가 그랬다.
"우리가 O이사 보고 일한 게 아니잖아. 밑에 O부장이 뒤치다꺼리 다 했고, 그 사람이 보고 일했지."
카리스마 넘치는 상사
가끔은 해리포터의 마법 스틱을 갖고 싶다는 생각 했었다. 개념 없는 막내 팀원, 머리 좀 굵어졌다고 대드는 선임 팀원, 어린애들도 아닌데 왜들 싸우는지... 이걸 그냥 한방에, 마치 타노스의 핑거 스냅처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상엔 그런 해결책은 없었고, 허무함만 커져 갔다.
나름 카리스마를 가져보려고 노력해봤다. 원칙과 권위를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회의 때마다 회사의 가치체계를 설파하고, 근태 규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며, 모든 업무는 사전에 충분히 고민하고 회의에 참여해서 리딩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했다.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요새 팀장이 안 하던 짓을 하며,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워지는 기억이다. 카리스마는 결코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카리스마가 있는 상사는 '예전에' 많았던 것 같다. 뭐든 만들어도 잘 팔리던 80~90년대(IMF 이전까지)에는 기업은 언제나 팽창 일로였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체계에서 본인의 능력이 받쳐만 준다면, 승진은 자연스럽게 되고, 그에 따라 고급 정보는 그에게 모이게 된다. 상층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실적까지 따라준다면, 점차 카리스마 있는 상사가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조직은 과거와는 아주 다르다. 정보는 공개되어 있고, 직원 개개인은 전보다 똑똑하며, 권위보다는 개성이 중시된다. 이런 여건은 어쩌면 현재 팀장에겐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상황일 수도 있다.
세상의 변화
한동안의 '카리스마 놀이'가 끝난 후, 불현듯 다른 상사 한 분을 떠올랐다. 첫 번째 직장의 첫 번째 팀장님. 분명 그도 과거의 상사였다. 대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실적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그러면서 자연스레 카리스마를 갖게 된. 하지만, 비전을 보여주고, 팀원들을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때론 실수도 있었고, 그걸 인정하기도 했다. '더러운 이 회사 때려치우고, 나가서 같이 사업하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 그는 회사를 만들어 팀원들 상당수와 함께 일했다.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직원을 내보내지 않고, 사재를 털어가며 회사를 운영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났을까. 그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어둑어둑해진 야밤에 도착한 촌동네 영안실. 예전 함께 근무했던,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이 와계셨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덤덤한 상황이었는데, 과장님이 불쑥 한마디 하셨다.
"OOO 사장님이 돌아가셨다고. 우리가 모셨던 팀장님이..."
누가 시작했는지 기억은 없다. 그냥 우리 넷은 얼싸안고 울었다. 시커먼 남자 넷이 그냥 울었다. 평생 남을 위해 그렇게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팀원 중 내가 죽으면 울어줄 이가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도 들었다.
카리스마를 넘어선 상사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 새로운 역사를 손흥민이 쓰고 있지만, 전설 No.1은 차범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대를 안고, 1998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결과는 예선전 중도 해임. 네덜란드에 5 - 0으로 참패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후 축구협회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해서 꼴사나운 일이 있었다.
지인에게 오래전 들은 얘기다.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프리킥 시범을 보였는데, 선수 누구보다도 더 잘 찼다고 한다. 이걸 본 선수들은 '우리 감독님처럼 잘 차 봐야지' 했을까. 다들 기가 꺾였다고 했다. 카리스마 있는 상사 곁에는 사람이 없다.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조연이 필요 없다.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내가 잘못을 숨길 때보다 드러내 놓고, 인정할 때 팀원들과 관계가 좋아졌다. 그 순간은 정말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오류를 받아들이고, 개선을 약속하면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팀원들도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서 지적이나 의견 제시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리더란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하는 페이스 메이커란 생각이 더 들게 된다.
선수보다 잘하는 감독
많은 사람들이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꿈꾼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없는(부족한) 것에 대해 더 이상 부담감과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카리스마는 점점 그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 생성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리딩에는 다른 것들이 더 필요하다. 과거의 카리스카처럼 한방의 마법 스틱은 없다.
카리스마는 오히려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리더가 완전체이기 때문에 주위엔 예스맨들만 존재한다. 리더는 예스맨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기도취에 빠져 현실감각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는 타인과 환경에 대한 무감각이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이런 상사는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한 명의 뛰어난 팀장보다는 팀원들이 따라주는 부족한 팀장이 백 배는 낫다. 부족함도 장점이 될 수 있다. 그것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