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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E Feb 23. 2023

제주엔 한라산도 있고 한라산도 있고 한라산도 있다

사계절만 살아보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을 때 지방러 동기들과 주말이면 귀에 익은 단어를 수집이나 하듯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타워를 올려다보며 남산을 오르고 63빌딩의 아쿠아리움을 가고 한강에서 유람선을 탔으며 홍대의 놀이터, 이대 앞 옷가게, 인사동의 쌈지길, 압구정의 로데오 거리를 걸었다.


제주도에서 어떤 단어들을 수집할까?


서울에서 언니가 왔다. 육아 휴직을 끝내고 회사 복직을 보름 앞둔 언니에게 형부가 자유의 시간을 선물한 것이다.


'네가 잘 아니깐 전적으로 너에게 이번 여행을 맡길게.'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나 역시 제주에선 관광객이었는데 겨우 열흘도 안 된 지금엔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처음으로 부대장에게 막중한 임무를 하달받은 이등병의 마음처럼 설렘과 더 큰 부담감이 밀려왔다.


가족 중 제주도 여행을 한 번도 못 한 사람은 없다.

'제주에 우리가 모르는 남자친구라도 있냐?'라고 엄마가 말할 만큼 그중 당연 제일 많았던 건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주를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 더 사랑했을 뿐이었다.


도대체 육지 사람들은 왜 제주에 이렇게 열광하는 걸까?

이 지점부터 시작해야 언니가 만족하는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 치열하고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에 지칠 때 이번 제주 여행을 떠 올리며 한 줄기 빛 같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에게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이끌기도 하니깐.


겨우 며 칠 사이에 <우리들의 블루스> 영주처럼 '육지사람들은 맨날 봐도 똑같은 이 바다가 뭐가 좋다고 구경하러들 오는지 서울이 재밌지 이 깡시골이 대체 뭐가 좋다고'라는 말이 어떤 의민지 어설프게 알 것 같아 앞으로의 시간이 조금은 두려워지고 있는 찰나였다.


서울과 가까운 동해바다, 전국의 맛집들이 즐비 해 있는 강남, 아기자기 한 건물과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는 상수, 쇼핑의 메카 명동, 서울의 삶이 삭막하다고 느껴질 때면 옛것들의 요충지 종로구.

그러고 보면 서울에는 없는 게 없었다.

없는 게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작은 것에 충족감을 느끼긴 어렵다. 서울에는 없는 것을 선택해야 했다.


한라마운틴.


10여 년 전쯤 한라산에 처음 올랐을 때의 감동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다.

영실코스의 목표지점인 윗세오름에 거의 다다랐을 때 펼쳐지던 평지.

천국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와 함께 올라간 한라산은 겨울에 내린 눈이 중간중간 녹지 않고 쌓여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평소에 신던 운동화를 신고 산을 올랐다.

맑았고 바람이 불었고 파란 하늘이 있었고 희뿌연 하늘이 있었던 한라산은 서울로 돌아가는 언니에게 제주에서 제일 잘한 일이 되었다.



살아가면서 제주의 단어를 하나하나씩 수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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