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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E Mar 12. 2023

.. 그러니깐 왜 봄냄새가 났냐고..

사계절만 살아보면

어제는 미세먼지가 제주를 뒤덮었다. 서울살이에선 문화적 특권을 누리는 대신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건 어쩌면 공정한 거라 생각했다. 제주도의 봄도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꺼풀에 뿌연 막이 덮고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게 뿌옇게 보였다. 출근길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한라산도 며 칠째 미세먼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기온은 15도를 웃도는데 눈앞이 흐리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일기예보에선 일요일 비 소식이 있었다.

'잘 됐다, 답답한 모든 걸 씻어버렸으면...'


일요일,

성당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피스텔에서 보던 하늘은 비가 온다던 어제의 예보와 달리 맑았다.

바람도 따뜻했다.

(집) 창문으로 보이던 동쪽 하늘은 맑았는데 바깥의 서쪽 하늘엔 잿빛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성당까지는 15분,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쪽하늘과 서쪽하늘을 번갈아 보며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성당으로 바로 가야 할까,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바람이 서쪽 하늘의 구름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바람의 움직임이 보이는 걸 보니 빠르게 동쪽으로 가는 서쪽의 비 구름도 미사가 끝날 때쯤이면 멀리 사라 질 것 같았다.

내리는 빗방울에 흙냄새가 났다, 봄냄새.

'아, 진짜 봄이네. 좋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문이 닫힌 가게의 처마에 올라섰다.

집에 가야 할까 성당으로 가야 할까,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몇 분 동안 망설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리 우산을 준비한 사람들과 갑자기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인 사람들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옆집 가게로 들어서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53분, 이제 7분 남았다. 비를 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분침이 정각을 코앞에 둔 시계처럼 선택을 재촉하는 건 항상 시간이다.


"우산 하나 드릴까요?"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옆가게로 들어갔던 남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아...ㅇ...아니에요, 조금만 가면 돼서...."  

비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미사가 끝나 갈 때쯤 성당 안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더 많은 비가 온다는 말이었다.

'아, (우산을) 받아올걸 그랬나...'


후회는 선택보다 한 템포 느리게 온다.


미사를 끝내고 나왔을 땐 빗줄기가 굵게 변해 있었다.

나처럼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계단에 서서 비를 피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난 전화를 걸 누군가도 없었으며 어디쯤에 편의점이 있는지도 모르니

소강상태가 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것인가 집까지 최선을 다해 뛸 것인가,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빗줄기가 굵어지니 눈앞에 입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트렌치코트 안에 반팔이라니. 기다리기엔 봄옷이 추웠다.

..... 차라리 뛰는 게 낫겠다.

'아..... 우산 받아올걸.....'


목이 간질간질하고 으슬으슬 추워졌다.

엄마가 챙겨준 판피린을 이렇게 먹을 줄은 몰랐다.


'.... 아프면 안 되는데, 여긴 타진데...'

봄냄새 그런 건 모르겠고 입안에선 털어 넣은 판피린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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