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Jun 02. 2023

겨울왕국 아렌델로 첫 여행 떠난 딸

며칠 전부터 아내는 자꾸 떨린다고 했다.

난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래도 부모 없이 처음 밖에서 자는 건데'라는 아내의 말에 '에이, 별 걱정 다 한다'고 말했지만 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삼남매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장, 수줍은 성격이지만 강단 있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 K-장녀 첫째 딸이 인생 첫 여행을 떠났다.

스웨덴에 와서 엄마 아빠 없이 떠나는 첫 여행을 가게 될 줄 몰랐다.

바이올린 수업 중인 첫째

첫째는 봄학기부터 방과 후에 지자체 음악학교가 운영하는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꾸역꾸역 들고 와 먼지만 쌓여가는 바이올린을 보고 '이럴 거면 뭐 하러 들고 왔냐'던 아내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첫째는 첫 수업부터 생기가 돌았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다 보니 잊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의 감각이 살아났다나 우쨌다나.

매주 월요일 방과 후를 학수고대했다.

바이올린 선생님은 첫 레슨 때 첫째에게 오케스트라 합류를 제안했다.

실력이 좋아서였는지, 그저 자리가 남아서였는지 첫째는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고 연주의 기쁨을 다시 느낀 첫째는 즉석에서 'Of course'를 외쳤다고 한다.

최근에는 앙상블 연습까지 하면서 일주일에 3일간 강행군 연주를 하고 있다.

나도 한 번씩 따라가곤 하는데 연습실 밖으로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 선율에 귀가 호강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합주 모습

그러던 중 바이올린 선생님이 오케스트라 축제가 열리는데 같이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면 모두 참가할 수 있다는 거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축제 개최 장소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노르웨이 베르겐(bergen)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스톡홀름 근교 도시나 멀어봤자 말뫼나 예테보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네이버 '유랑' 카페를 검색하며 몇 번이나 머릿속에 여행 루트를 짜봤던 노르웨이 서남쪽 관문 도시 베르겐.

환상적인 피오르드 절경을 감상할 수 있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아렌델의 모티브가 된 도시.

첫째는 가고 싶은데 혼자 가는 게 약간 겁이 난다고 했다.

'아빠가 대신 가면 안 되겠니?'라는 말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고물가로 악명 높은 노르웨이인데 참가 비용이 꽤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첫째가 가겠다면 보내야지, 정말 좋은 기회 아닌가 싶었다.

며칠 뒤 바이올린 선생님이 보낸 메일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1인당 참가비가 500크로나였다. 엥, 5000크로나가 아니고?

우리 돈 6만원가량만 내면 음악학교 측이 항공료, 숙박비, 식비, 교통비 모든 걸 책임졌다.

단체 후원을 받았다고 했지만 정말 저렴한 비용이었다.

세컨핸즈숍에서 산 검정 구두. 잘 샀다고 생각했는데 교묘하게 짝짝이였다.

첫째는 며칠 고민하더니 '엄마, 나 갈래'라고 선언했다.

그래 당연히 가야지!

첫째는 공연 때 입을 흰 셔츠를 사고 세컨드핸즈숍에서 검정 구두도 구매해 원정 공연 준비를 마쳤다.

전날 짐을 챙기던 첫째는 여전히 긴장되는 모습이었다.

스웨덴어도 잘 못하고 학교 친구와 달리 오케스트라 단원들과는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인데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대망의 출발일 날이 밝았다.

나는 둘째와 막내 등원등교시키느라 첫째가 가는 걸 보지 못했다.

아내는 첫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탄 전세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이 처음으로 며칠이나마 부모를 떠나는 건데 마음이 싱숭생숭했으리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태우고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으로 떠나는 버스

첫째는 버스 안, 공항 도착, 점심, 비행기 탑승 등 일련의 과정을 쉴 새 없이 문자로 보내왔다.

부모 없이 떠나는 첫 여행이라는 애틋한 감정도 잠시, 첫째가 바로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것 같았다.

난 첫째에게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줘'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첫날 베르겐에 도착하자마자 2시간, 둘째 날은 5시간 동안 오케스트라 연습만 죽도록 했다고 한다.

공연은 마지막 날에 한다는데 노르웨이 베르겐까지 가서 공연장과 연습장만 실컷 보고 올 수도 있겠다.


그래도 가슴과 머리에 많은 걸 남기고 오겠지.

또 하나의 추억과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인생의 첫 경험 말이야.

첫째가 돌아와 풀게 될 이야기가 기대된다.

첫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축제가 열릴 베르겐 공연장
첫째가 보내온 베르겐 거리 풍경과 영화 겨울왕국의 한 장면. 겨울왕국은 베르겐을 배경으로 했다는데 얼핏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이전 12화 유치원에서 인생 첫 이별, 막내의 폭풍 눈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