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Jun 05. 2023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

스톡홀름 '문화의 밤'과 한국 '문화가 있는 날'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한국에서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이다.

국민들이 전국 주요 국공립 박물관, 미술관, 고궁 등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문화시설이나 문화활동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날 도서관은 평소보다 늦은 오후 8시까지 문을 열고 지역에 따라 극장 영화관람료가 할인된다.

프로 스포츠 관람 할인, 각종 공연이나 문화행사 무료 관람이나 할인 혜택도 있다.

문화시설이 많은 서울에는 비교적 '문화가 있는 날' 행사나 혜택이 많은 듯하다.

지역은 몇몇 공연 관람료 할인 외에 주로 영화관람료 할인이 대세인 것 같다.

몇 년 전 문화가 있는 날에 관람료 5천원에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있다.

'문화가 있는 날' 지정 이유

왜 하필 수요일인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박물관, 미술관 등을 무료로 개방한다 한들 평일 낮 시간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과시간 이후 이런 문화 혜택을 누리려 해도 내일 회사나 학교 갈 생각을 하면 약간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을 늦게 마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가 있는 날' 홈페이지를 보면 문화가 있는 날은 문화기본법 12조 2항에 근거하고 있다.

국민들이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별도로 문화가 있는 날을 지정ㆍ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0년 전인 2014년 1월부터 문화가 있는 날을 시행 중이다.

문화가 있는 날을 왜 수요일로 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문화 행사 할인이나 무료 관람 혜택이 있는 것은 국민의 문화적 향유를 위해 분명 좋은 일이다.

아비치 익스페리언스 내부 긴 대기줄

지난 4월 세계적인 DJ 겸 프로듀서인 아비치 박물관 '아비치 익스페리언스'(Avicii Experience)에 다녀왔다.

'스톡홀름 문화의 밤'(Kulturnatt Stockholm) 행사를 통해서였다.

스톡홀름에 온 이후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 행사 덕분에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했다.

스톡홀름 문화의 밤은 그 규모에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매년 4월의 한 토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는 스톡홀름 시와 스톡홀름 내 문화시설 혹은 문화기관의 협력 사업이다.

스톡홀름 지자체가 행사 전반을 조정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맡고 문화시설, 문화기관은 이날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담당한다.

놀랍게도 이날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누구든 무료로 문화시설이나 문화기관을 방문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스톡홀름 문화의 밤 홈페이지에 있는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들

문화의 밤 행사에 참여하는 문화시설이나 기관은 무려 200개가 넘었다.

해마다 참여업체의 수가 증가하는 것 같았다.

행사가 시작된 지 10년은 족히 넘은 듯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020년과 2021년엔 디지털 온라인 행사로 치러졌고 지난해부터 오프라인 행사가 재개됐다.

스톡홀름 시민에겐 너무나 당연한 행사겠지만 스웨덴 시한부 거주자인 나에겐 너무나 신기한 이벤트였다.

스톡홀름 시민이 아니어도 누구든 행사를 즐길 수 있었다.

동아시아박물관, 근대박물관이 있는 Skeppsholmen에서는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행사나 영업을 하는 문화기관, 시설도 있었다.

스톡홀름 시는 새벽시간까지 T-센트랄렌역과 Skeppsholmen을 오가는 임시 셔틀버스도 운행했다.

스톡홀름 문화의밤 리플렛 중 일부

프로그램이 200개가 넘다 보니 도대체 어떤 행사를 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홈페이지에는 문화기관이나 시설 위치와 춤, 가족, 영화, 공연, 박물관, 음악, 연극, 하이킹 등 프로그램 종류로 행사를 검색할 수 있었다.

검색하기 귀찮은 사람을 위해 랜덤으로 행사 하나를 골라 설명해 주는 코너도 있었다.

문화의 밤에 참여하는 시설이나 기관 중엔 아바(ABBA) 박물관, 노벨박물관 등 유료 박물관이 대거 포함돼 사람이 많이 몰렸다.

술 제조공장 투어, 서커스 체험, 문학 모임 등의 프로그램도 있었다.

침실처럼 꾸며놓은 도서관

도서관에서도 개방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하고 누워서 책을 보라고 침대를 놔두는가 하면 현대무용 레슨 등 특색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한국문화원에서도 K팝 춤 경연과 한국영화 관람을, 각국 대사관에서도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아이와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도 많았다.

단순히 무료 관람만 하는 곳도 있었으나 문화의 밤을 위해 자체적으로 준비한 행사나 프로그램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문제는 한정된 시간에 프로그램이나 행사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비치 박물관 앞에 형성된 긴 대기열

문화의 밤 당일 스톡홀름 중심인 세르겔 광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스톡홀름 문화센터(Kulturhuset) 등 여러 문화시설이 모여 있어 문화의 밤 행사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비치 익스페리언스가 있는 건물에는 이미 상당히 긴 줄이 있었고 1시간을 기다려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외스터말름 쪽으로 이동했는데 레스토랑이나 주점 등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문화의 밤 이벤트로 스톡홀름 전체가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난 아비치 박물관에 입장하려고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문화의 밤 행사가 많이 열린 유르고르덴으로 가는 버스는 사람들로 꽉 차 문도 열어주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난 아이들과 함께 유르고르덴에 있는 기술박물관(Tekniska museet)을 가려고 했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버스 타기도 쉽지 않아 돌아서야만 했다.

사전에 동선과 시간을 잘 고려해 방문할 곳을 선택한다면 자정까지 알차게 보낼 수 있을 듯했다.

입장료 때문에 망설이던 문화시설 한 두 곳을 가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 4월 22일 스톡홀름 문화의 밤 때 다양한 행사가 많이 열린 Kulturhuset

처음이라 스톡홀름 문화의 밤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지만, 스톡홀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려 재미있었다.

토요일 밤이라는 시간도 누구든 부담 없이 참여하기 좋았다.

행사 참여 기관이나 시설은 이날 저녁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콘텐츠로 시민에게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1년에 단 하루 스톡홀름 시민은 문화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스톡홀름 시의 스톡홀름 문화의밤 취지 설명

한국 '문화가 있는 날'은 스톡홀름 문화의 밤보다 자주인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각종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고 상대적으로 프로그램 수는 적다.

반면 스톡홀름 문화의 밤은 1년에 단 하루 저녁에 200개가 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

다만 문화가 있는 날을 평일인 수요일보다는 주말에 하는 것이 국민이 일상 속에서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한 명의 시민이라도 더 극장이나 공연장으로 불러내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알다시피 백범 김구 선생의 문화국가론 중 일부다.

넷플릭스 영화 '오징어게임'이 히트를 치고 세계적인 그룹이 된 BTS가 유엔총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올라갔다.

외국인이 너도 나도 코리아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인지도도 많이 상승했다.

처음 만난 외국인이 BTS를 안다고 했을 때 나 역시 기분이 좋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내 뭔가 허전한 감정이 있었다.


정부가 노동시간을 주 52시간도 모자라 주 69시간으로 늘리는 것을 추진 중이라는 한국 뉴스를 접했다.

이미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나라인데 거기서 더 늘린다는 말을 듣고 기겁하는 다른 나라의 반응을 봤다.

한국은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실로 짧은 시간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야 하고 평일에 많은 이들이 문화생활을 편하게 누릴 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부강하다고 문화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닐 터다.

시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높여 준다는 점에서 '문화가 있는 날'은 좋은 정책이다.

박근혜 정부 때 시작해 정권이 두 번 바뀌면서도 계속되고 있는 이 정책이 계속 더 발전해 문화적 접근성뿐 아니라 문화적 여유, 삶의 풍요로움으로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물론 '문화가 있는 날'뿐 아니라 문화 인프라나 역량, 노동과 적절한 휴식의 조화 등이 두루 요구되는 문제 이긴 하지만 말이다.

김구 선생이 한없이 가지길 바랐던 높은 문화의 힘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톡홀름 힐튼호텔의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