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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 Pul Dec 17. 2023

니체 씨, 오늘은 안녕하신가요?_비틀걸음

# 14 _  더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 12      


 더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또다시 시골 버스 안. 16일이니까 장날입니다. 오후 2시55분. 상안리 가는 버스. 장보기를 일찍 마친 노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웁니다. 시큼한 냄새. 막걸리를 한잔 걸쳤는지 버스 안 공기가 이내 텁텁해집니다. 이게 시골 버스지요.


 버스가 한 정류장 지나기도 전에 졸기 시작하던 노인들이 우항리를 지날 즈음 버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뜹니다. 차창 밖으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길옆에 펼쳐진 밭에 배추 잎사귀가 널려있는 걸 봅니다. 뒤늦게 배추를 수확하면서 겉잎을 떼어낸 것이지요. 김장 김치는 벌써 거둬들였고 일부를 남겨둔 것. ‘입동 전까지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추는 추위에 의외로 강해서 영하 10도까지도 끄떡없습니다. 

 “아이고, 아까워라. 저걸 왜 버렸나.”

 한 사람이 중얼거리자 옆자리에서 받습니다.

 “그러게. 저거 만 오천 원어치는 되겠다. 요새 배추 금이 헐하지 않은데.”

 “예전 같으면 저런 거 버리지 않았지. 요즘 사람들은 아까운 줄 몰라. 지금이라도 저걸 거둬다가 돼지 뼈다귀와 함께 된장 풀어 푹 삶아 밥 말아 먹으면...”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제각기 쩝쩝 입맛을 다십니다.


 한가로운 버스 안 풍경. 코가 익숙해졌을 텐데 아직도 막걸리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 막걸리 열풍이 분다고 하던데 요즘엔 시골에서도 막걸리 마시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대세는 소주. 버스가 없던 시절, 장 보러 왔다가 출출한 배를 채우려 막걸리 마시고, 동태 한 마리 볏짚에 꿰어 들고 비틀비틀 귀가하던 동네 영감님들의 모습은 이제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거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소주는 아무리 마셔도 다리가 꼬이지 않지만, 막걸리에 취하면 다리가 꼬인다는 사실. 소주에 취하면 휘청거릴 뿐 여간해서는 다리가 엑스자로 꼬이지 않습니다. 막걸리 마시고 꼬인 다리를 감당하지 못해 논두렁에 쓰러져 잠들면,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보고 마을에 도착해 자식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면 아들은 리어카 끌고 달려가 아비를 실어 오고, 아비는 아직 술에서 깨어나지 못해 리어카 안에서 겨울의 푸르른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칩니다. 

 “옘병, 세빠지게 일해도 결국 리어카 신세구나! 이놈아, 애비는 비록 리어카지만 너는 나중에 삐까번쩍한, 거 뭐냐, 그래, 마이카, 마이카를 타라!”       


 니체 씨. 당신의 글을 읽을 때마다 너무 빨리 달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을 거부하고, 신을 부정하고 인간 본연의, 개인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 그러나 어느 일본 작가가 당신이야말로 ‘자기 계발의 선두 주자’처럼 여길 정도로 모든 일에 당신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이 삶을 너무 경쟁적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해 숨 가쁜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옷을 깨끗하게 입으려 합니다. 혹시 냄새가 날까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싫어할까봐. 헛소리할까, 꼰대 같은 소리를 할까 싶어 입을 굳게 다물고, 표정도 가급적 엄숙하게 짓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묵함이 아니라 고집으로 읽힌다는 건 뒤늦게 알았습니다.


 니체 씨, 당신이야말로 조금은 여유롭게, 비틀걸음으로 걸었어야 했습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비틀비틀, 한가롭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당신을 좀 더 너그럽게 받아주지 않을까요? 당신의 초인도 소리 지르지 말고, 비틀 걸음이었으면...


 문득 버스에서 내려 막걸리 마시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비틀비틀 걸어가고 싶어집니다. 

 니체 씨, 당신에게만 살짝 고백하지만, 늙어가는 일도 쉽지만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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