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 동감 혹은 밑즐 긋기
# 21 – 동감 혹은 밑줄 긋기
군립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작가 줌파 라히리의 책을 빌렸다. 책 제목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펴냈다.
벵골 출신의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영어권 작가 줌파 라히리. 그녀가 익숙한 영어를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워 대화는 물론 소설까지 쓰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단순히 언어 학습의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변신을 통한 한 인간의, 한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녀는 벵골어, 영어, 이탈리아어, 이 세 가지 언어생활을 통해 작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기쁨과 호기심을 가지고 드러낸다.
집에 와서 읽으려는데 어떤 페이지에 무지개 색깔의 견출지가 꽂혀있다. 누군가 빌려 갔다가 자기 책이 아니라서 차마 밑줄은 긋지 못하고 꽂아 놓은 듯하다. 나도 그렇게 하니까.
호기심이 일었다. 그도 줌파 라히리를 좋아하겠지. 그녀의 글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을까. 어떤 생각에서 견출지로 체크해 놓았을까.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밀한 것을 훔쳐보는 느낌.
-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언어적 추방에 익숙해져 있다. 모국어인 벵골어는 미국에서 보자면 외국어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살아갈 땐 계속 기묘하고도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홀로 환경과 조응하지 않는 미지의 비밀스러운 언어를 말하는 것같다. 그리움이 자신 안에 거리를 만든다.(25 페이지)
- 이젠 이탈리아어를 썩 잘 말하지만 그어는 날 도와주지 못한다. 대화는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종종 포용의 행동이 담겨 있다. 말할 때 난 실수할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종이 위에서 나는 혼자다.(56페이지)
-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내가 침입자, 사기꾼같이 느껴진다. 이탈리아어의 글은 내겐 어색한 억지 숙제 같다. 경계를 넘어가 길을 잃고 도망치는 느낌이다.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영어를 포기했을 때 난 내가 믿는 권위를 포기한 것이다. 난 확신 없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미약하다.(72페이지)
-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나 나 자신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75페이지)
- 불가능을 인식한다는 게 창조적 충동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을 듯한 모든 것 앞에서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사물에 대해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고는 그 무엇도 창작할 수 없다.(81페이지)
굵은 글씨는 내가 임의로 체크한 것이고 딱 이 부분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다. 그럼에도 대략 이 대목에 특히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모른 사람의, 익명의 사람의, 홀로 깊이 생각하는 자의 외로움이 도드라진다. 글 쓰는 사람일까?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모티브를 가지고 쓴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나도 밑줄 긋고 싶은 곳에 똑같이 밑줄을 그은 사람. 누군지 모르지만 이 시골에서 동지를 만난 기분. 위로가 된다. 니체 씨도 그런 적이 있나요? 위로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