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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풍뎅이 시인 Jan 24. 2023

꼬르따사르를 읽고 있었다

 머리에 흰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른이 조금 넘었을 무렵부터였다. 나는 어렸고 입사 후 처음으로 책임감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일을 많이 했다. 어느 날 얼굴을 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는데 나는 맨질한 얼굴을 하고서 소매를 걷어 붉은 반점이 뒤덮은 팔뚝을 부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 얼마 뒤 부서를 옮겼다.

 평생 동안 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길면 귀찮아도 몇 번이고 잘라줘야 하는 것처럼. 흰 싹이 올라오면 검은 칠을 해야 했다. 검게 칠해도 일주일이 지나면 여지없이 흰게 올라왔다. 3주까지는 어찌어찌 감출 수 있었지만 4주 차까지 내버려 두면 어쩌다가 나의 머리통에 시선이 멎은 사람들이 이질감에 갸웃거리는 모양새를 봐야만 했다.

 나는 하얗게 된 기분이었다. 머리가 이르게 세어버린 것이 때에 맞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아직도 이렇게 젊은 것이 때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눈이 내리면 이미 마음은 깊은 겨울을 지나게 된다. 그래서 어서 늙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나름의 생명활동에 아주 열심이었다. 비록 세어버린 꽃이라도 계속하여 틔우길 멈추지 않는다. 한 달 동안 2cm 정도 자랐다. 한 달은 2cm이고 2cm는 한 달이다.

 마지막으로 칠을 한 것은 2주 전이었다. 아니, 2주 전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변화를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제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졸음과 씨름을 하다가 문득 흰 싹이 올라오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거울에 몸을 기대고 머리털 사이사이를 헤집어 보았다. 2주일이면 새끼손톱 반틈만큼의 흰 싹이 올라와야 하는 시간이다. 머리털을 아무리 헤집어도 흰 싹은 보이지 않았고 머리칼은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소파로 돌아와 다시 누워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손톱을 소제한 것이 언제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파를 다듬다가 손톱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했고 파를 다듬다 말고 티슈를 펼쳐놓고 손톱을 깎았던 일은 기억이 났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손톱은 아주 오랫동안 이대로의 모양이었던 것 같고 나는 그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째서 흰 싹이 올라오지 않을까. 어쩌면 마지막으로 칠을 한 것은 2주 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틈만큼의 흰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2주의 시간이 흐른 일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 밖에는 크고 흰 구름이 떠있었고 언제부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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