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그때 거기 프로젝트

by 강이람

인천공항 20210912


공항은 나를 새벽 7시 이전에 일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만큼 나는 공항에 대해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공항에 대한 이러한 진심은 비단 나만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항에 대해 예의를 갖추며 최선을 다한다. 약속에 늦지 않고, 설레는 마음을 유지하며, 나름 편하지만 아껴둔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보답을 하듯, 공항은 우리를 낯선 곳, 혹은 자유로운 곳으로 데려다준다. 여행이 아닌 출장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도착한 그곳에서는 나의 약점을 알거나, 나에게 고정관념이 있는 상사나 동료가 없다. 나의 신분을 일정 기간 세탁해 주는 곳이 공항이다. 합법적으로 말이다.


신분 세탁하러 온 이들의 필수템, 캐리어에는 나의 소망이 꽉꽉 압축되어 들어있다. 가방 안에는 평소에는 입지 않은 화려한 색의 원피스와 과장된 실루엣의 모자, 한국 땅에서는 착용한 적 없는 비키니, 과장된 모양의 귀걸이, 오글거리게 예쁜 작은 노트와 고르고 고른 책 몇 권 등이 들어있다. 나는 그곳에서 독서를 사랑하는, 수영에 좀 조예가 있는, 낯선 이들과 영어로 나이스하게 프리 토킹을 즐기는, 키 작고 밝은 동양 여성이 될 것이다.


인천 공항은 (많은 경비를 들여 예약해놓은) 새로운 신분으로 갈아타기 위해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들 것 가득 찬 곳이다. 로밍, 환전, 이메일 발송 등등 말이다. 내 경우엔 늘 위경련+설사+알레르기 등의 반려병에 대비한 비상약 구매라는 필수 리스트가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골골이의 대명사인 내가 여행지에 가서 아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출국 허가 도장이 찍히는 순간 나의 면역체계가 마법처럼 강력하게 바뀌는 것이다.


여하튼 입국 절차의 마지막으로 나의 신분 세탁의 목적이 불순하지 않다는 것을 검증받는 출국 허가 도장을 받고 나면, 화려한 조명이 감싸는 면세점이 나타난다. 명품 소유에 별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꼼꼼하게 각 코너를 돌아본다. 사실 면세점의 아이템이란 뻔하디 뻔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면세점에서의 나는 이미 “오늘 돈 좀 쓰지, 뭐”라는 여유 넘치는 자아로 변환되고 있다. 굳이 결제를 하지 않아도 돈을 써제끼겠다는 태세를 갖춘 나 자신에게 충만감을 느낀다. 그 순간에는 주택담보대출이니, 관리비니, 아이 학원비 등이 적힌 머릿속 엑셀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멋진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으로 도는 파워(그래, 파워!) 포인트만 활성화될 뿐이다.


아, 여기까지만 썼는데도 인천 공항이 그립다. 사실 그곳에서는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맛없고 비싼 식사를 먹고, 귀찮은 검사 절차를 거치는, 유니크한 경험이라곤 실상 전혀 없지만-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막무가내의 기대감을 허용하기에 특별하다. 나 정도면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거야 라고 기대했던 초딩, 나는 평생 단짝 친구를 만들거야 라고 생각했던 사춘기, 나의 첫사랑은 이루어 질거야 라고 설레하던 20대, 나는 회사에서 승승장구 할거야 라고 생각했던 30대. 이렇게 조금은 허무맹랑한 목적지를 꿈꾸던 공항 같던 나의 그 시절들이 그리운 것처럼 말이다.


가지 않았지만 갔고, 하지 않았지만 했고, 먹지 않았지만 배부른 곳, 인천 공항. 내 인생의 인천 공항이 부디 제발 사라지지 않고 다시 북적거리길 바래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