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2020년 7월부터 부천필의 상임 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습니다. 이후, 한동안 객원지휘체제로 연주회가 이어지다 2021년 6월, 부천필은 상임지휘자 자리에 장윤성 지휘자를 선임하고, 부천과 서울에서 각각 취임 연주회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지난 6월 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한 277회 정기연주회에 다녀왔어요.
이번 취임 연주회의 첫 곡에는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은 생상스의 다섯 개 교향곡 중 가장 마지막 교향곡인데요. 작곡가 본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말한 곡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계열의 음악적 형식과 프랑스 고유의 정체성 확립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또 생상스만의 색채도 함께 칠해나가 꽤 재밌는 곡이기도 하죠. 특히 오르간만의 특별한 음향적 효과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전자 오르간보다는 파이프 오르간을 통해 음악을 들으면 감동의 크기가 배가 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예술의전당은 파이프 오르간이 없어서 보통 전자 오르간으로 연주가 이어지고, 세종문화회관은 파이프 오르간을 갖추고는 있지만, 애초에 다목적홀로 설계가 되었기 때문에 예전엔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롯데콘서트홀(목욕탕이라는 비운의 별명이 붙은 곳이지만)이 있어 오르간이 들어간 레퍼토리만큼은 믿고 들을 수 있는 곳이 생겨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연주를 듣기에 앞서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특히 2019년, 티에리 피셔의 지휘로 서울시향이 롯데콘서트홀에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 정말 아주 끝내주게 잘 들었던 개인적인 경험까지 더해졌으니까요.
그런데 장윤성 지휘 아래 부천필이 연주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은 감동의 크기가 생각처럼 크지는 않았습니다. 관악기들의 종종 엇나가는 음정은 차치하고, 전체적인 해석도 생상스만의 혹은 프랑스만의 어떤 다채로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을 전혀 이끌어내지 못했어요. 특히 유연함은 떨어지고, 직진성이 강한 형태로 곡을 풀어내면서 풍부한 색채감이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덩달아 파이프 오르간을 통한 음향적 효과도 제대로 볼 수 없었죠.
그렇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는 교통정리를 하며 곡을 풀어내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연주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주 아쉬움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나름 '직진성', '교통정리'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를 캐치해냈기 때문인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를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취임 연주회의 성격에 맞춰 일종의 포부를 담아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미션이 지나고 두 번째 곡으로는 카셀라 교향곡 2번이 올려졌습니다.
카셀라는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1990년이 되어서야 악보가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그의 교향곡 2번은 2017년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초연(당시 지휘자 장윤성)된 적이 있었던 만큼 익숙한 작곡가도 아닐뿐더러, 흔히 연주되는 곡도 아닙니다.
음원이 아닌 공연장에서는 장윤성과 부천필의 연주로 처음 들어보는 작품인데요. 전체적인 인상은 오케스트라 편성이 큰 만큼 곡의 규모도 매우 크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카셀라가 말러를 특별히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 말러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고, 동시에 R. 슈트라우스, 쇼스타코비치,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여러 작곡가들의 체취도 함께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1악장은 ‘비극의 프롤로그’라는 부제가 달려 있던 흔적이 있고, 악보 마지막에는 단테 신곡의 일부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1악장과 4악장에서 종소리(튜블러 벨)로 매우 잘 표현됐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1악장에선 정말 비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듯했고, 마지막 악장에선 정말 구원의 종소리가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종소리 사이에서 귀가 먹먹해지는 투쟁의 울림이 이어집니다. 저는 마치 해상에서 전투를 벌이는 군함이 떠올려졌습니다. 이 투쟁의 울림은 그 자체로서의 매력을 넘어 (표현이 좀 그렇지만) 섹시하게까지 느껴졌어요. 곡 중간엔 타국으로 넘어간 것이 연상될 만큼 이국적인 색채를 느껴보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곡에 압도, 아니 압사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4악장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긴 하는데, 그 존재감이 좀 묻혀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좀 아쉽다고 한다면, 오케스트라의 덩치를 거대하게 키워 객석을 덮쳐버렸지만, 생상스에서도 느꼈듯 풍성한 색채감을 보여주진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카셀라 교향곡 2번 정도의 스케일에서 풍성함을 갖추려면 섬세함의 깊이가 남달라야 할 텐데... 현실적으론 좀 힘든 부분이 있었겠지만요.
아무튼 곡이 끝났을 땐, 곡에 압도당한 만큼 저를 포함한 관객들은 힘찬 박수갈채를 보내었고, 그들은 이에 화답하는 의미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중 바카날레를 연주했습니다.
이렇게 연주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자 군함의 함장 같았던 장윤성 지휘자의 취임 연주회에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상징성을 노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통정리 잘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
항해를 시작했다. 과거에 비극이 깔린 투쟁도 했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든 투쟁이 이어질 수 있겠지만, 항해의 끝에는 구원을 받은 듯 평화가 깃들 것이다.
카셀라 교향곡 2번의 국내 초연은 내가(장윤성) 했다. 항해할 때 생기는 부차적인 문제는 함장인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살려서 지휘하겠다.
비슷한 레퍼토리로 사골처럼 우려 낼 생각은 없다. 레퍼토리는 확장시킬 것이고, 팡팡 터지는 한국적인 레퍼토리를 개발할 것이다.
취임 연주회에서 ‘오르간’이 들어가는 레퍼토리를 선곡한 것은,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갈 부천아트센터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성공적인 준공을 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상징성은 관객 입장에서 음악을 듣고 해석해 보이는 주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저들이 의도하지 않은 억측일 수 있겠지만, 다시 시작하는 악단을 향한 앞으로의 기대감과 격려, 응원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봐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침 부천에서 진행한 취임연주회 영상이 남아 있네요.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연주를 진행했을지 궁금하시다면 방구석 1열로 감상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취임연주회 포스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8564229813663528&id=119827004770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