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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강원 Jan 29. 2022

KBS교향악단, 피에타리 잉키넨과 함께한 서사시

KBS교향악단 피에타리 잉키넨 취임연주회

KBS교향악단 피에타리 잉키넨의 취임연주회

이번 연주회에선 시벨리우스의 카렐리아 서곡과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율리아나 아브제예바의 협연을 듣기도 했지만,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시벨리우스의 레민카이넨 모음곡이다.


이번 연주회에 참석하기 전 핀란드의 서사시 칼레발라를 먼저 읽고 곡을 감상했기 때문인지 레민카이넨의 경우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한 편의 오페라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에 대한 후기라기보다는 곡에 대한 감상에 더 가까울 듯 하다.

 

더블 공연에 모두 참석했기에 하루는 프로그램 노트의 흐름에 따라 레민카이넨의 첫 번째 일대기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하루는 네메 예르비의 음반 북클릿에 설명된 흐름에 따라 두 번째 일대기가 혼합된 형태를 머릿속에 그려내며 감상했다.

 

1곡 ‘레민카이넨과 섬의 처녀들’의 경우가 프로그램 노트와 북클릿이 서로 상이했던 부분 중의 하나이다.

 

첫 번째 일대기에 입각하여 본다면, 사흐리 초원 너머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과 거의 뭐 납치당한 것과 다름이 없는 킬리키의 당혹스러움과 위기감, 애원과 같은 심경이 느껴졌다.

 

그렇게 킬리키의 심경에 집중하다보니, 리드미컬한 선율은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는 댄스 본능(나중에 이것 때문에 레민케이넨이 두 번재 구혼을 하러 떠나기 때문에)처럼 느껴졌고, 1곡의 끝에선 어느덧 체념하고 레민카이넨의 구혼을 받아들인 킬리키의 마음이 느껴졌다.

 

두 번째 일대기에 입각하여 보았을 땐, 복수심에 눈이 멀어 포욜라의 주인을 살해한 레민카이넨이 포욜라의 군대에 쫓기다 피신처로 삼게 된 섬에서의 일상을 그린 이야기이다.

 

곡이 시작할 무렵 항해 끝에 마주한 섬의 모습(혹은 섬에 도착하고 있는 배를 바라보는 섬의 여인들)이 떠올려 졌고, 리드미컬한 선율은 어떠한 이유(아마 전쟁을 치르러 원정에 나갔겠지)에서인지 남자가 모두 떠나가 버린 이 섬에 레민카이넨의 방문으로 춤과 술이 함께해 활기가 돋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나오는 선율은 여인들이 내민 손을 뿌리칠 일 없는 호색한 주인공이 유혹에 넘어가는 심경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설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어머님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이 곡의 끝에서는 어머니의 당부로 이 섬에서 3년이란 시간을 피난하게 되었지만, 이 모든 유혹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레민카이넨의 짧은 아쉬움도 함께 느낄수 있었다.

 

2-3곡의 경우 레민카이넨의 첫 번째 일대기 중 투오넬라(죽음의 강)에서 구혼의 마지막 과업을 수행할 때 보여지는 두 개의 풍광을 담았다.

 

총보를 보니 2곡을 투오넬라의 백조, 3곡을 투오넬라의 레민카이넨으로 구성되어 있던데, 잉키넨의 경우 2곡과 3곡을 바꿔 연주했다.

 

3곡 ‘투오넬라의 레민카이넨’의 경우, 처음부터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트레몰로는 투오넬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잃은 어머님의 마음이 함께 표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선율에는 길과 달과 태양에게 물어 아들의 행방을 쫓고 있는 어머님의 마음과 투오넬라에 조각나버린 레민카이넨의 시체를 건져내는 어머님의 모습이 뒤엉켜서 연상됐다. 하여간에 마지막 첼로 솔로는 아마도 영웅의 부활이 아니었을까…

 

레민카이넨의 어머니

2곡 ‘투오넬라의 백조’의 경우, 앞서 들었던 투오넬라의 풍광이랑은 전혀 상반됐다.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는 있으면서 잔잔한 강의 모습이 펼쳐졌다. 이 때 울리는 잉글리시 호른은 마치 검은 백조 한 마리가 연상됐다. 죽음의 강에서 서식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강에 있기 때문에 외롭고 처량한 모습도 함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잉글리시 호른만큼이나 첼로 솔로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첼로 솔로는 무엇을 표현했을까? 레민카이넨? 백조의 울음소리? 눈먼 절름발이 목동, 메르케하투?

 

내가 듣기엔 2곡에서 전체적인 포커스를 백조에게 맞추면서 메르케하투가 뱀을 풀고, 레민카이넨이 죽음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은 다른 주변 악기들로 표현하여 아웃포커싱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첼로 솔로는 레민카이넨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그 곡의 끝에서있는 첼로의 음성은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투오넬라의 백조

4곡 ‘레민카이넨의 귀향’은 퇴근을 하고 귀가하는 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곡을 들으며 숨이 가빠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레민카이넨이 귀향을 하는 순간은 첫 번째 일대기에서 레민카이넨을 부활시킨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갈 때, 두 번째 일대기에서는 3년간 피신했던 섬에서 돌아갈 때, 그리고 포욜라의 안주인에게 복수를 하러가다 파카넨(잭 프로스트)을 만나 복수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살펴볼 수 있다.


근데 곡을 들으며 숨이 가빠졌으니, 부활 후 어머님과 함께 귀향한 모습보다는, 말을 만들어 귀향 길을 서둘렀다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마지막 귀향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우리들의 귀와 마음을 흔들어 두었던 앙코르, 핀란디아와는 별개로 레민카이넨의 귀향은 설 연휴를 앞둔 우리들에게 꽤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레민카이넨 모음곡은 꽤 매력적이었다.

칼레발라를 통해 보여지는 레민카이넨의 여러 모습을 연상할 수 있도록 꽤 중의적으로 설계해 듣는 감상자로 하여금 재미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이번에 감상할 때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스토리라인이 아닌 제각기 독립적인 장면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는데, 다음엔 또 어떤 모습으로 감상하게 될까? 궁금하다.


피에타리 잉키넨 & KBS교향악단(2022.1.29.)

늘 말하지만 이렇게 잘 올려지지 않은 재미난 레퍼토리를 많이 발굴 해주었으면 좋겠고,


그렇기 때문에 카렐리아 서곡을 들었으니 모음곡도 한번 들어보고 싶고, 더블베이스와 팀파니 등 저음을 적극 활용하는 걸 보니 언제 한번 바그너 좀 들어봤으면 싶다. (잉키넨 따라가려면 관악기 연습 많이 해야겠더라)


아! 그리고 악단의 관악기나 협연자의 1악장을 보아하니, 더블 공연에는 역시 두 번째 날이 진리구나 싶었다.




※ 이미지 출처:

-KBS교향악단 피에타리 잉키넨 취임연주회 포스터:

https://www.kbssymphony.org/ko/concerts/concerts_view.php?number=26969


-투오넬라의 백조:

https://csosoundsandstories.org/what-sibelius-achieved-under-the-spell-of-the-kalevala/


-레민카이넨의 어머니:

https://en.m.wikipedia.org/wiki/Lemminkäinen%27s_Mother#/media/File%3AGallen_Kallela_Lemminkainens_Moth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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