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해둔 추억 몇 점 갖고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클래식 음악에 깊게 빠지게 된 추억의 한 부분을 조명해볼까 한다.
2015년, 취준생이었던 나는 여러 악재가 겹쳐 마음온도가 절대온도에 가까우리만큼 차갑고 혹독한 시절을 지내고 있었다. 회색 빛이 가득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야 할 시기였지만, 그땐 시간을 낭비하는 형태로 방황을 했었다.
방황이라고 해서 아주 대담하고 거칠지는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기호식품을 활용하기보다는 주로 영화관을 많이 찾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작품 속에서 던져내는 메시지나 스쳐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에 삶의 의지와 의미를 함께 찾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 와서 그때를 떠올려보면, 당시 겪어보았던 삶의 굴곡이 그리 깊지는 않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때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올라가는 이 시대에 1호봉이라도 더 올라갔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마음의 시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인데다 이를 극복해 내는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알게 된 시기였으니까.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을 진지하게 마주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시에는 한 주에 개봉한 영화를 이틀 정도에 몰아서 봤다. 문제는 이런 생활도 4-5개월 정도 하니, 남는 5일의 시간은 공허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무료했다. 독서실에 앉아 있었지만,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느 날은 인디그룹 ‘스탠딩 에그’의 콘서트를 가게 됐다. 주로 감상적인 곡을 소화하는 아티스트이지만, 공연에선 앙코르부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기본적으로 나의 성향은 내향형이다. 더군다나 당시엔 즐겁게 뛰어놀고 싶은 상황도, 마음도 전혀 아니었다. 객석 분위기는 나의 속도 모른 채 ‘방방’이 되어 말 그대로 콘서트장이 되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함께 분위기를 맞추고는 있었지만, 내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클래식 공연에 대한 갈증이 컸다. 당시 내가 거주하던 곳은 창원이었고, 시립예술단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어 부지휘자와 객원지휘 체제로 정기공연을 진행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공연의 퀄리티는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라 생각했고, 발걸음을 주저하게 됐다. 그러던 와중에 영화도 대중가요도 나의 마음을 채워주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인근 지역에 위치한 통영국제음악당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 소식을 접하게 됐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의 협연으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올린다는 소식이 유난히 반가웠지만, 인접한 또 다른 도시의 낯선 풍광 속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한데 막상 연주를 듣고 보니, 생각보다 아쉬움이 컸다. 협연자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함께 호흡을 맞춘 오케스트라 연주 완성도가 낮아 귀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그래서 인터미션에 고민이 많았다. 2부에 진행하는 드보르작 교향곡 9번을 들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왕 시간 내어서 왔으니 끝까지 남아있기로 했다.
드보르작의 교향곡이 연주됐다. 2악장의 잉글리시 호른의 소리가 들려오자 드보르작이 그려낸 향수 가득한 사무친 그리움이 나를 자극했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가장 보통의, 가장 평범했던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날 교향곡 연주 완성도가 어떠했는지는 기억에 나진 않는다. 그런데 영화도 대중가요도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드보르작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은 분명했다.
한국 클래식계에서 2015년은 스타들이 탄생한 해였다. 그래서 조성진, 임지영, 문지영 때문에 클래식에 입덕했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드보르작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입덕을 하게 됐다.
아. 물론 클래식 음악을 완전히 모르고 살지는 않았다.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클래식 공연을 찾았고, 클래식 음악이 플레이리스트의 일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애정을 갖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내 마음 속 깊이 찾아온 건, 한 순간이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나의 이야기를 좀 더 풀어내어 보겠다. 2016년이었던가…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씨가 심근경색으로 요절했다. 그의 협연 무대를 2011년에 들어보았는데, 그의 연주가 어떠했는지, 또 어떤 감상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예술을 즐기는 상황에서 망각의 동물은 아쉬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기록 문화를 중요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 받기로 했다. 공연에 다녀오면, 짧은 소감이라도 기록하게 됐다. 이왕이면 관심사를 나누고 싶었고 그래서 누구나 사용하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했다. 부캐가 생겨난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단문의 짧은 소감문을 올리는 정도였지만, 점차 할 말이 많아졌다. 이후 서울시향 서포터즈 등의 대외활동을 하게 되면서 표현력은 더욱 깊어갔다. 덕분에 본캐보다 조금 남다른 추억이 많다. 지역신문이나 공중파 방송사의 인터뷰 같은 사소한 것도 있지만… 나의 기록이, 나의 일기장이 월간지나 정기간행물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클래식 전문잡지 ‘음악저널’ 3월 호의 ‘음악 IN 만남’ 코너를 통해 인터뷰를 해보이기도 했다.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과 함께 클래식 입덕기, 인생 공연 그리고 소리를 글로 풀어가는 과정이 대담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앞서 소개한 나의 이야기는 아주 사적인 부분 중 일부인데, 분량 문제로 월간지에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다. 대신 인생 공연과 클래식 음악이 본업에 미치는 영향 등 다른 여러 이야기도 많이 풀어냈다.
사실 가장 보통의 관객인 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별것 없다. 대신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의 이야기가 유퀴즈를 보는 것처럼 알찬 내용이 많다. 추억을 복원한, 라떼 이야기. 서로 다른 세대 간의 클래식 입덕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음악저널 3월 호를 한 번 들춰보시기 바란다.(도서관 매거진 앱을 활용하면, 과월호도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