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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강원 Jun 05. 2024

안데르센 자서전을 들춰낸 국립발레단의 인어공주

국립발레단이 지난 5월 1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인어공주>를 올렸다. <인어공주>는 2005년 덴마크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로열 덴마크 발레단이 존 노이마이어에게 의뢰한 작품으로 국립발레단 200회 정기공연에서 한국 초연이 이뤄졌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후원자인 요나스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 콜린을 사랑했다. 이에 에드바르에게 편지로 마음을 비추어내 보았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드바르는 헨리에트와 결혼했고, 이후 안데르센은 섬에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낸 <인어공주>를 집필하였다.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는 '인어공주', '왕자', '바다 마녀', '공주' 외에도 안데르센의 분신과 같은 '시인' 배역이 추가됐다. 디즈니가 각색한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안데르센이 경험한 사랑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며 원작이 가지는 의도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연출과 감정을 전달하는 과정은 직관적인 편이었다. 무대 장치에는 곡선 형태의 거대한 LED 스트립을 활용하여 바다 물결을 형상화하였다. 극의 흐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고, 마녀의 등장에 폭풍우치는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 색상이 번개 치듯 바뀌기도 했다.


바닷속 환경을 표현하는 여러 장치들도 인상적이다. 인어공주의 지느러미를 나타내기 위해 통이 넓은 긴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수중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색 의상을 입은 세 명의 보조 무용수, 시인, 왕자에 이르기까지 남자 무용수가 인어공주를 수차례 들어 올리며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 결과 마치 중성 부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 외에 인어공주의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로 쓰인 테레민은 주로 수중 장면에서 활용됐다. 이는 고래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기도 해 바다의 풍광을 청각기관을 통해서도 느껴보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했다.


작품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오브제는 주요 주제를 원활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무대 정중앙에 위치해있던 '소라껍데기'는 안데르센의 목소리를 담았다. 시인에서 인어공주에게로, 인어공주에서 왕자에게로 전달된 이 오브제는 끝내 결혼식을 찾은 하객에게 버려지다시피 취급된다. 외면받은 사랑의 속삭임은 결국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작품 속에는 왕자의 모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인은 에드바르로부터, 인어공주는 왕자로부터 각각 모자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끝내 인어공주는 왕자의 모자에 칼을 꼽으며 등장한 마녀의 제안에 넘어간다. 여기서 모자는 사랑에 눈이 멀어 상대의 작은 관심에도 행복을, 때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상징성을 나타냈다.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에는 조명을 활용한 컬러 코드를 사용하였다.

바닷속은 남색이다.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평화롭고 행복한 공간이다. 그래서 다리를 갖고 난 뒤 남색 배경을 사용할 땐 왕자에게 관심을 받거나,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상상을 하며 인어공주의 행복한 심리상태가 표현됐다. 해변의 배경은 베이지색이다. 다리를 갖고 처음 육지로 올라갔을 때 느꼈던 고통만큼 인어공주 시점에서 아픔을 표현한 색이었다. 그래서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던 공주의 등장 장면,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중 진행된 들러리의 춤과 연기에 일부 활용됐다. 외에도 마녀에게 현혹되는 과정에서 청록색이 쓰였고, 절망과 체념이 담긴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붉은색이 활용되기도 했다.


존 노이마이어가 채색한 엇갈린 사랑의 아픔은 매우 아팠다.

발가락 개수를 헤아리며 다리가 생겼다는 것에 잠시나마 기뻐했던 인어공주는 처음으로 지면과 발이 닿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지느러미를 제거한 뒤 만난 왕자에게서 행복한 미래를 꿈꿔보았지만 휠체어에 탄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어공주는 왕자와 공주의 춤사위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인어공주는 휠체어를 타지 않을 정도로 발이 무뎌졌다. 하지만 왕자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에 몸부림치고, 피로 얼룩진 상처를 입는다.


작품에선 양성애 성향을 가진 안데르센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도 한다. 수녀원에서 입었던 공주의 의상을 시인과 인어공주가 함께 들어 보이는 장면, 인어공주가 지느러미를 잘라낸 이후부터 선원들과 함께 춤을 추지 않거나 춤을 추더라도 비웃음만 사는 장면, 하객과 들러리들이 남녀 한 쌍이 되어 춤을 추는 장면 등을 꼽아볼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신체의 일부를 과감하게 포기한 인어공주를 볼 때 성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단계와 같았고, 이에 따른 주변인들의 조롱도 함께 느껴볼 수 있었다.


한편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가 작곡한 음악은 '인어공주의 동기', '왕자의 동기', '공주의 동기' 등 라이트모티프를 활용해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했다. 또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의 1주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동기,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4악장 1주제 등 기존에 작곡된 곡을 차용하여 작곡한 부분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처음 올려진 작품이라고 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반주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진행했고, 이를 이끈 사이먼 휴잇은 무대와 연주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면서 대부분의 흐름을 매끄럽게 가져갔다. 특히 마녀가 등장할 때 들려오는 기괴한 분위기, 인어공주가 다리를 갖는 과정에서 고조되는 긴장감 등을 잘 살려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선원들의 군무와 2막 중 마녀 일당들의 춤에선 다소 낮은 텐션으로 곡을 풀어가 아쉬움을 남겼다.


국립발레단이 200회 정기공연으로 진행한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이 경험한 실패한 사랑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며 그의 자서전 한 페이지를 들추어냈다. 이로써 설렘과 행복만을 선사할 것 같았던 사랑이란 존재는 고통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안무가가 만들어낸 이 주제에 관객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보낸 사랑에 상대방이 화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외면해야 할까? 단순히 고통과 절망이 뒤따른다고 해서?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통해 고통과 좌절감을 맛보았다면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대 밖으로 향한 '소라껍데기'는 이제 관객들에게 주어졌다.


<국립발레단 인어공주, 사진=이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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