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거머쥔 당 타이 손은 어느덧 60대 중반을 지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도 부서진 피아노로 연습을 이어가는가 하면 ‘서양인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처럼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인종 차별적 평을 받는 등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보낸 바 있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을 방문하여 ‘렉처 리사이틀’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모친상으로 해당 공연은 취소됐다. 그리고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지난 6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가지며 다시 한국 관객들을 찾았다.
포레 서거 100주년을 맞아 <녹턴>, <뱃노래>로 공연의 포문을 열었으며, 드뷔시의 <두 개의 아라베스크>, <가면>, <어린이 차지>를 연주했다. 2부에서는 쇼팽의 곡들로 채워졌다. <뱃노래>, <녹턴>, <왈츠>, <스케르초 2번>까지 쇼팽 스페셜리스트의 진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이번 연주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회상의 순간을 만들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1부 포레와 드뷔시의 곡에서는 터치에 힘을 빼어서 대체로 관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포레의 <녹턴>과 <뱃노래>에서는 서정적인 순간을 더 강조한다거나 유려함 속에 잠깐 고개를 내민 내적인 단단함, 배 표면에 떨어지는 물방울 등 순간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연주를 이어갔다. 반면 드뷔시에선 힘을 더 빼고 악상을 좀 더 옅게 채색했다. 이런 관점에서 드뷔시의 <가면>은 그 정점을 향해 가는 듯하기도 했다.
한편 <아라베스크 2번>의 경우 다른 곡들과 달리 도입부에선 템포를 빠르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스터치가 두드러지는가 하면 곡 전반적으로 표현이 딱딱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이 노출됐다. 그럼에도 이 곡에서 한순간의 프레이징을 매우 여리게 표현하여 관객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스피치 기술을 선보이기도 해 매우 인상적이었다.
회상의 순간은 드뷔시의 <어린이 차지>에서 보다 두드러졌다. 1곡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에선 어떤 한 프레이즈를 붙잡고 연습곡을 연주하는 아이의 지루함을 표현하고자 늘어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트있게 해석한 대목이다. 2곡 ‘짐보의 자장가’에선 코끼리 인형의 무게감을 충분히 살려내는 모습이 돋보였다. 3곡 ‘인형을 위한 세레나데’나 5곡 ‘어린 목동’은 곡의 풍광을 잘 나타낸 편이었다. 도자기 인형을 갖고 소꿉놀이하는 모습이나 목가적인 풍광이 잘 그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4곡 ‘눈송이가 춤춘다’에서는 끝없이 내리는 눈발과 같이 곡의 풍광을 특별히 강조하기보다 눈이 어서 그치기를 바라는 아이의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충실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 타이 손은 가장 리드미컬한 6곡 ‘골리워그의 케이크 워크’마저 회상 장면을 그리듯 악상을 옅게 채색하였는데, 이는 이번 프로그램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끝까지 잘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었다.
2부에서 진행한 쇼팽 대부분의 곡은 악상을 좀 더 분명하게 가져가는 모습을 보였다. 넘실넘실 대는 뒷배경은 다소 흐린 편이었지만, 주선율은 전달하고자 하는 멜로디를 분명하게 던져내는 모습이었다.
당 타이 손은 쇼팽 특유의 감정선을 적정선에서 유지하는 형태로 곡을 풀어나갔다. 대체로 감정의 과잉이 없어 가슴속 한 귀퉁이 속에 담아둔 사랑의 추억을 관객들에게 전달해 내는 듯했다. 이로써 1부와 비교할 때 표현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2부 역시 ‘회상’의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서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중립적이거나 무미건조했다는 것은 아니라는거다. 본인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연주를 이어나갔다. 가령 <스케르초 2번>의 경우 여유있는 프레이즈와 순간의 폭풍과 같은 루바토를 병행하며 곡을 풀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필자가 추구하는 해석의 방향성과는 다르지만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한편 쇼팽의 <뱃노래>의 경우 전체적인 연주는 준수한 편이었으나 굴곡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힘겨운 모습을 보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흐릿한 기억의 시각화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였던 이야기꾼과 같았던 당 타이 손. 지난해 겪었던 모친상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일까? 전쟁통에도 피아노를 놓지 않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객석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음악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한 이번 공연은 각기 다른 미학으로 연주를 풀어내고 있었다.
<프로그램>
G. Faure:
*Nocturne in e-flat minor Op. 33, No. 1
*Barcarolle in a minor Op. 26 No. 1
C. Debussy:
*2 Arabesques, L. 66
*Masques, L. 105
*Children's Corner, L. 113
F. Chopin:
*2 Nocturnes
in c minor Op. posth
in c-sharp minor Op. posth
*Barcarolle in F-sharp Major, Op. 60
*5 Waltzes
in E Major Op. posth
in E-flat Major Op. posth, B. 133
in G-flat Major Op. 70 No. 1
in b minor Op. 69 No. 2
in A-flat Major Op. 34 no. 1(당초 Op.42를 연주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Op.34-1을 연주함.)
*Scherzo No. 2 in b-flat minor, Op.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