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 바라본 피아니스트 정명훈과 임윤찬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면 어디에선가 날아 들어온 아름다운 선율을 쫓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선율에 시선을 돌려보면 어느샌가 무대에서 빛나고 있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객석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지난 4월 28일, 정명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있었습니다. 포디움에 서 있던 그가 무려 7년 만에 건반 앞에 앉아 독주회를 가진 것이죠. 공연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협주곡을 통해 지휘와 연주를 동시에 하던 때를 떠올리며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 공연에 앞서 대구를 비롯해 전국투어를 돌고 있었는데요. 연주의 완성도가 썩 높지 않다는 후기를 몇 번이나 접하게 되었어요. ‘하... 어쩌지?’ 예매를 취소할 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쉽게 접하지 못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아서 숨 고르기를 한 뒤, 일부 기대감을 좀 내려놓고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감상 포인트를 어디에 맞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번 투어에 앞서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운 여정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경험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황혼기에 접어든 음악가가 그려낸 풍광을 보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인생의 아름다운 여정’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60번부터 시작됐어요.
농도 짙은 터치가 해수면에 뿌려졌고, 어느덧 저 깊은 심해까지 번져나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가 뿜어내는 음색이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됐습니다.
하이든의 곡이 끝나자 피아니스트 정명훈은 “(중간 입장 관객들이 있으니까) 좀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냥 연주를 진행하겠다.”며 한마디 툭 던져 보이더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을 연주했습니다.
역시나 후일담에서 들려오던 문제의 구간들이 2악장에서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음이탈(미스터치)이 꽤 많았고, 프레이징도 이걸 베토벤 소나타라고 하기엔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가 언급한 ‘영혼의 자유로움’이 이런 것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후일담에선 ‘암보를 통해서 진행했지만, 제대로 암보가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차라리 악보를 보고 연주를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바 있어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 연주에선 그런 심각한 부분은 노출되지 않아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악장이 끝나자 정명훈은 객석을 향해 무엇이라고 속삭이곤, 손을 만져 보이는 등 관객에게 이해를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전 그런 정명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노쇠한 부모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잔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 순간부터는 속으로 응원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프로그램북 속 해설의 한 구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30번은 그의 후기 소나타 중 가장 낙천적이고 삶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언급했거든요.
어쩐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인터미션이 지나고 이어지는 브람스의 세 개의 간주곡 Op. 117과 네 개의 피아노 소품 Op. 119이 연주되었습니다. 그는 간결하면서도 투박하게 곡을 끌어냈고, 동시에 하이든에서 느꼈던 음색을 모래시계에 담아낸 것처럼 농도가 짙어질 만하면 옅어지는 모습을 반복하며 브람스가 그려낸 풍광을 선명하게 비췄습니다.
거기다 당일 연주회에선 좀 심각한 관크가 있었습니다. 객석에서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거든요. 그런데 그는 특별하게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건반으로 표현하는 등 예술의전당에 들어선 황혼의 별은 가슴속에 넉넉함을 가득 담아 음악을 향한 사랑의 피아니즘을 그렇게 표현해냈습니다.
한편 지난 5월 6일, 임윤찬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있었습니다. 이제 17살로서 천재 소리를 듣는 피아니스트이고, 그 이전에도 워낙 좋은 연주를 들었던 터라 기대감에 또 부풀어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뜸을 들이다 무대에 나선 그는 인터미션을 사이에 두고 바흐, 하이든, 멘델스존을 박수를 받지 않고 하나의 곡처럼 진행했으며,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7개의 바가텔, 에로이카 변주곡을 하나의 곡처럼 진행했어요.
금호아트홀의 아름다운 목요일 시리즈인데, 개인적으론 전날 어린이날의 영향으로, 마치 월요일 같았던 일상을 보냈던 터라 대체로 멍하니 음악을 듣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신을 번뜩이게 만드는 순간이 생겼어요. 그가 히이든 건반 소나타 D장조,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소나타를 연주할 때였습니다.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어 내었는데... 객석에 앉은 저는 이 폭풍우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는 이 속에서 어두운 면모를 조금씩 드러내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인상적입니다.
잠시 인터미션을 가졌음에도 일상에서 오는 피로감에 또다시 멍하니 음악을 듣게 되었지만, 이내 임윤찬은 다시금 존재감을 나타내었습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에서 그는 커다란 폭풍우는 어디 가고 돌돌 말린 파도를 보여주면서도 독특한 루바토에 리듬감을 뽐내며,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속에 담긴 다양한 면모를 자유롭게 담아내었습니다.
맙소사! 이게 고작 17살의 연주라니...
금호아트홀에 나타난 떠오르는 별은 어두운 색채에 폭풍과 파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디로 튈지, 얼마나 더 크게 빛이 날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만의 색을 갖춘 피아니즘을 그렇게 표현해냈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오는 10월 1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스트를 들고 우리들 곁으로 또 찾아옵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피아니스트가 또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이렇게 황혼기의 별과 떠오르는 별이 만들어낸 환상의 피아니즘은 그 어떤 순간보다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또 어떤 별을 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적는 중에도 객석에서 바라보던 별들이 그리워집니다.
(이 글의 요약본을 클래식 전문잡지 [음악저널] 독자 코너에 기고했습니다. 음악저널 6월호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 이미지 출처
- 정명훈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
- 아름다운 목요일 스페셜 콘서트 임윤찬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