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도 브람스는 마음속을 헤집어 놓았다.
지난 1월, 3전 4기 끝에 공연을 진행한 피아니스트 김선욱. 서울에서 독주회를 가지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김선욱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이어갑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공식적으로 출판한 곡이 3곡이지만, 최소한 8곡은 되는 곡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브람스 자신이 완성도가 높지 않은 곡이라고 판단하고, 작품들을 폐기했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출판되어 우리들 곁에서 연주되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는 곡의 구성과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의 휴양지(푀르차흐)에서 만들어진 곡으로도 알려져 있어요. 그의 친구(빌로트)의 증언에 따르면 브람스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감성도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즈넉한 인상도 들어가 있고, 밝고 정열적인 감성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곡이죠.
그러나 이 곡으로 가장 잘 알려진 건 따로 있습니다.
일전에 브람스는 크라우스 그로트의 시를 곡으로 녹아내렸는데, 그의 가곡 '비의 노래(Op.59/3)'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앞서 먼저 작곡되었지요. 그런데 이 곡이 바이올린 소나타 1번 3악장의 시작 부분이 같습니다. 그래서 소나타 1번을 보고 많이들 비의 노래 소나타라고도 부르기도 하죠.
저는 이 몇 가지 주요 특징만 좀 기억한 채 이들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비의 노래'와 관련되어 있다 보니, 3악장에만 쓰였던 '비'라는 소재를 저는 모든 악장에 걸쳐서 함께 좀 느껴보려 했었죠.
그러다 보니 곡을 감상하는 동안 피아노의 모든 음표들은 빗방울과 같았고, 바이올린의 모든 선율은 음악이라는 도화지에 채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대체로 포근하고, 따뜻했습니다. 이탈리아를 생각하니, 조금 더 밝고 정열적인 느낌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한 겨울 맹추위를 잠깐 잊으라며, 포근하고 따뜻함을 선물하였나 봅니다.
거기다 피아노로 표현된 빗방울들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왔던 걸 보면, 김선욱의 피아노 연주는 독일 계열의 레퍼토리에서만큼은 그 꽃이 만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2악장에서는 1악장과는 달리 바이올린의 색채가 조금은 아쉬움을 남긴다고 생각했을 무렵, 장송 행진곡풍의 곡의 분위기가 다가오자, 피아노가 묵직하게 울립니다. 뭐랄까요. 브람스의 피아노 곡들을 들어보면,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흔히 알고 있던 브람스의 묵직함이 여기에서 들려옵니다. 순간 바이올린의 연주는 어디 가고, 제 귓속에는 오로지 피아노에만 집중해서 음악을 들어보았던 순간이었어요.
3악장으로 들어서면서, 바이올린의 소리는 모래 같은 질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급하게 외운 클라우스 그로트가 쓴 원작 시를 되뇌며 곡을 들어봤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나 어릴 적 꾸었던 그 꿈에서 다시 한번 나를 깨워다오.
빗물이 모래 속에서 거품 짓는 시간에!
(중략)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우리가 문 앞에서 불렀던 옛 노래를 깨워다오.
빗방울이 밖에서 소리치는 시간에! 나 다시금 듣고 싶어라.
달콤하고 촉촉한 소리를 내 영혼 부드럽게 젖어들어라 어린이의 순수한 경외감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브람스의 감성은 마음 한구석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렇게 곡이 끝났는데, 바이올린의 활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도 없이 고요합니다. 곡의 여운을 찬찬히 찬찬히 음미하니, 곡이 끝난 뒤에 더 스며드는 브람스의 울림이 가득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브람스가 스위스의 호수 근처에서 곡을 썼다고 알려진 곡입니다. 브람스는 3년 정도의 여름을 여기서 보냈는데, 친구도 많이 사귀고 독일 리트 가수였던 한 여인(슈피스)과 썸도 타고... 하여간 굉장히 좀 나름 행복한 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 곡도 밝고 한편으론 좀 느긋한 곡이기도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2005년이었나요? 왼손 검지 부상으로 거의 4년은 연주를 하지 못하셨어요. 아예 바이올린 활을 잡지 못하셨는데, 그래도 어느 순간 복귀하시며 연주를 쭉 이어가고 계시죠. 저는 그녀의 전성기 연주를 음반으로, 유튜브로만 접했고, 실제 공연장에서 마주한 건 부상 이후의 연주들이었어요.
글쎄요.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뭐 지금도 그래요. 뭘 모르면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걸로 트집 잡고, 투덜댑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래식 음악이라는 게 지나온 세월이 있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있고, 다양하게 연주되죠. 녹음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아니 제 입맛에 맞는 음악을 접하기란 너무 쉬운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런 부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객석에 앉았을 때 아쉬움만 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쉬움만 쫓다 보면 제가 투자한 물질과 시간을 그냥 버리게 되니까요. 그래서 가급적 기대치를 낮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머리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일정 부분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이올린 소나타 2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사실 소나타 1번에서 빗방울 사이로 칠해지는 컬러감은 모든 순간이 또렷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곡을 감상하는데 커다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2번에선 커다란 방해가 된다고 느꼈나 봐요. 아쉬움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특히 1번보다 좀 더 밝은 분위기 속에서,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 특유의 표정이나 제스처에서 나오는 그 밝은 분위기가 2번에서 잘 녹아내렸으면 했는데... 순간순간 삐쳐나가는 채색에 아쉬움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참... 사람 마음이란 게 간사하죠.
아쉽다고 아쉽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에도 2악장에서 노래하는 선율에, 정확히는 피치카토가 나오기 전까지 흘러나오던 순간순간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참... 걸작이다. 브람스가 만들어 낸 이 아름다움. 참 대단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람스는 친구들의 병사 소식을 듣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죠. 거기다 소나타 1번에서 언급한 그의 친구(빌로트)도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빌로트는 다시금 회복했지만, 브람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유독 아쉬움을 많이 느꼈던 소나타 2번이 끝나자 20분이라는 시간의 인터미션을 가집니다. 그리고 소나타 3번이 흘러나옵니다.
연주는 소나타 2번보다는 안정적인 순간을 맞이하였고, 그렇게 무심히 1악장을 듣고, 2악장으로 넘어가자 어딘가 모르게 슬픕니다. 이 서정적인 선율에 묘하게 슬픔이 배어있습니다. 그렇게 3악장과 4악장이 흘러나오면서 브람스가 느낀 어떤 체념도 함께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곡의 구조가 협주곡이나 교향곡처럼 스케일이 큰데, 이걸 연주자 두 명이 무대를 가득 매워 하나의 불꽃을 피워 보냈습니다.
소나타 2번에서 뭘 그렇게 아쉽다고 투덜대었는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를 가만히 바라보니,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이하 디마프)'가 떠올려졌습니다. 방영한지는 좀 되었는데... 할머니 세대를 바라보며,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바라보며, 젊은 날의 나도 그들을 공감해보던 작품. 사람 울리는 재주가 남달랐고, 사람 냄새 가득했던 드라마. 이제는 육체적으로 반응하는 것들이 젊은 시절 같지 않은... 그런 그녀의 연주가 브람스를 만나니 ‘디마프’가 자연스레 떠올려지더군요.
보통은 브람스의 곡을 듣고 나면, 한바탕 바람이 몰아친 것 같다고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 연주에선 저기 저 깊은 마음속을 다양한 방법으로 헤집어 놓았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앙코르도 좋았어요. 브람스가 우정을 기리기 위해 작곡했던 스케르초만 있는 FAE 소나타를 선곡하기도, 스트라빈스키 서거 50주년을 맞은 해에 듀오 콘체르탄테를 들어보기도 하며, 또 정경화표 엘가의 사랑의 인사까지... 하여간 참 선물 같았던 하루였다고 기록하고 싶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정경화 & 김선욱 듀오 포스터
(빈체로: http://www.vincero.co.kr/project/210119/)
※ 본문 내용 인용
- 브람스의 가곡 '비의 노래' Op. 59 No. 3의 가사이자 클라우스 그로트가 쓴 원작 시 발췌
(한산신문 / 글 김원철: https://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