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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Jul 11. 2024

연극에서 사교의 중요성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연극패 청년] 23기 신입 발표회가 막을 내리자 어느덧 3월이 되었다. 입단 초기 동기들 수는 열다섯 명 남짓이었는데, 신입 발표회 후 남은 수는 고작 일곱 명 정도였다. 약 50%의 인원이 이탈하고 만 것이다. 모두 각자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입단 초기 탈퇴하는 이유는 거의 한 가지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바로 '예상을 뛰어넘는 시간 및 체력 소모"가 그것이다. 직장인으로서 감당하기엔 연극이 주는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간과 체력을 요하지 않는 취미란 없다. 더욱이 스포츠 관련 취미는 연극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연극이 유독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느끼는 이유는,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에너지를 단기간에 몰아붙여야 하는 특수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등산 동호회 일정에 매주 등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등산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두세 달에 한 번씩 참여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연극은 한번 배우로 참여하면, 모든 일정을 통일하고 그 일정대로 지켜줘야 한다.


연극은 짧은 극은 한 달, 긴 극은 석 달 정도의 연습 기간이 필요하다. 공연을 3주 앞둔 시점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연습에 참여하게 된다. 재미있는 소꿉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발을 들였던 연극이, 알고 보니 본업 못지않은 시간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50%의 이탈률은 그다지 놀라운 수치도 아니다. 보통은 이를 웃도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이렇다면 극단은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이런 특유의 문제점이 해결 불가하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해당 문제점을 족집게처럼 집어낼 해결안은 없다. 체력 안배를 도모한답시고 다짜고짜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극을 올리지 않는다면 극단의 정체성은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대신 연극의 다른 장점으로 단점을 덮는 식의 대안을 고려해 볼 수는 있다. 장점이 너무 눈부셔 단점 따위는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는 『돌의 이름』을 준비하면서 그 대안의 불씨를 보았다.


연습 전 춤으로 몸을 푸는 배우들


현시점, 『돌의 이름』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의 신입들은 전멸 수준의 이탈률을 보인다. 『돌의 이름』팀은 100%의 생존율(?)을 보이는 한편, 다른 팀은 20% 미만의 생존율을 보이고 있고 그마저도 활동이 미미해서 0%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이런 확률의 차이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돌의 이름』팀 배우들이 더 시간이 많았던 것도, 더 열정이 뛰어났던 것도, 더 체력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신입 단원 모두는 여러 면에서 그래프의 최빈값에 위치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았고 그들은 떠났다.


이 차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대표적으로 사교활동의 빈도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극단에선 연극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사교활동이 앞서는 극단은 와해되기 쉽고 명맥 유지가 어렵다. 단원들을 하나로 엮을 '연극'이라는 끈이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을 최우선한다고 해서 사교활동이 등한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간혹 오로지 연극에만 집중하느라 단원과의 관계에 소홀한 사람이 있는데, 뛰어난 열정과 연기력에도 결국 극단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이는 내가 전 극단을 떠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도 부족한 사교 관계로 극단을 떠나는 마당에 신입들은 오죽하겠는가? 친분을 쌓을 기회가 적으면 극단을 향한 소속감 또한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특정 집단을 일종의 장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집단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다. 집단의 이름과 장소가 바뀌어도,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 변화가 없다면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즉, [연극패 청년]이라는 극단도 장소가 아닌 사람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입 단원들이 소속감을 느끼게 하려면, 연극 외에도 여러 단원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도록 사교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돌의 이름』팀의 연출은 사교의 중요성을 잘 아는 듯했다. 정확히는 사교를 의도했다기보단 삶에서 체득한 방식이 연출 방식에 자연스레 녹아든 듯 보였다. 그 덕에 네 명의 배우들이 하나로 결집하기 쉬웠고, 연극 연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혹자는 '『돌의 이름』팀에 우연히 사교적인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전에도 언급했듯, 팀에는 배우 한 명을 제외하곤 사교적이라 부르기 힘든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돌의 이름』팀의 연출


연출은 연습마다 약 15분을 잡담 시간으로 할애했는데, 예전의 나 같았으면 두 눈을 뒤집고 항의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전 극단에서 나의 부족한 사교성이 내 목을 옭아맸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가능한 한 잡담에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잡담에 지쳐 귀를 닫을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기계적인 추임새라도 넣으려고 했다. '아!', '그래요?', '진짜?' 등을 돌려쓰면 되니 어렵진 않았다. 그러자 '최선을 다해 너희들과 멀어지겠다'라는 기운을 풍겼던 여배우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느덧 서로가 조금씩 편해진 것이다. 그렇게 배우 간 소통에 윤활유가 스며들었고, 우리 사이에는 '우리 팀'이라는 일종의 소속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교가 낳은 소속감은 힘든 연습 일정을 헤쳐 나가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내가 이곳에 있고, 이곳이 나를 원한다는 느낌. 바로 이 느낌이 단원들이 극단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울타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소속감은 앞서 말했듯, 장소가 아닌 사람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장소는 단편적인 기억만 줄 뿐, 사람처럼 입체적이고 풍부한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소속감은 강렬한 감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신입 단원들이 활동 초반에 입체적이고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사교의 장을 적극 도모해야 한다.


단원들 사이 친분의 씨앗이 싹트고 소속감이 형성되면, 연극의 장점은 더욱 크게 부각된다. 연극은 본질적으로 '놀이'이다. 소꿉놀이와 같은 것이 예술로 승화된 것이 연극이다. 영어권에서 연극을 'play'라고 지칭하는 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약했던 친분을 강화한다. 연극이 바로 이 '놀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극단이 신입 단원의 마음속에 친분과 소속감의 작은 불씨만 심어줄 수 있다면, '연극'이라는 장작이 나머지 역할을 알아서 할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 신입 단원을 극단에 묶는 것은 소속감이다.

- 소속감은 단원 간 사교에서 발생한다.

- 그러므로 극단은 연출이 소규모 사교활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한다.


여기서 '지원'이란 '비용'을 의미한다. 어디서든 원하는 것엔 대가가 따른다. 극단이 높은 신입 생존율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사교에 필요한 비용을 초보 연출에게 전가하기보단, 극단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다. 물론 극단의 최우선 목적이 '연극'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를 간과하면 사교가 갖는 최악의 리스크인 '정치질'이 판을 친다. '연극'과 '사교' 사이의 균형은, 신입 생존율이 높은 팀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곳에 필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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