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발표회가 끝나고 약 1주 후, 『돌의 이름』의 연출은 맡았던 선배 단원이 톡을 보내왔다. 무슨 일인지 되묻자, 그는 '멘토멘티 공연'에 배우로 참여할 수 있냐며의사를 물었다. 멘토멘티 공연은 극단 내 선배 단원과 신입 단원이 함께 단막극을 올리는 프로그램이다. 신입 발표회 준비 중엔 선후배 간 접점이 적어 친목을 다지기 어렵다. 반면 멘토멘티는 선후배 간 교두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기 및 극단 활동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공연을 올린 직후였던 나는 한동안 쉴 계획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극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강제권, 김보연 작가의 옴니버스극 『모퉁이 고래식당』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제목만 들어도 달콤한 로맨스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4년간 연극을 하면서 로맨스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 그 탓에 구미가 당긴 건 사실이었지만, 섣불리 참여 의사를 밝힐 순 없었다. 로맨스 당사자가 아닌 로맨스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가 로맨스 당사자가 되는 건가요?"라고 묻기엔, 속이 너무 훤히 비치는 질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거만한 인상마저 풍길 수 있었다. 마치 '주인공이 아니면 참여하지 않겠다'라는 선포처럼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영악하고 음흉한 방식으로질문을 던졌다. "필요한 배우가 몇 명인가요?" 극 중 배역이 두 명이라면, 무조건 로맨스 당사자를 맡으리란 판단에서였다. 연출이 대답했다. "두 명입니다." 영악하고 음흉하기 그지없던 나는 곧바로 참여 의사를 전달했다.
참여를 수락하고 대본을 읽어보니, 이제는 내가 사랑을 고백하게 될 상대 배우가 궁금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 단원이었으면 했다. (내 음흉함이 발동했던 건 아니다. 극의 몰입도와 완성도를 위해 이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연출은 이미 여배우를 섭외한 상황이었다. 상대 배우는 21기 선배로서, 입단 첫날 환영 공연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던 단원이었다. 당시 선배 단원은 의사 역과 학생 역을 분했는데, 기억 속 그녀는 발랄하고 쾌활한 이미지였다. 그래서인지 대본에 묘사된 인물과 궁합이 좋아 보였다.
환영 공연에서 만난 21기 선배
추후 알게 된 사실로는, 연출은 '사랑과 우정 사이'로 극을 선정한 후 마음속으로 캐스팅을 확정했다고 했다. 그게 바로 나와 21기 선배 단원이었다. 연출은 그 외에 다른 대안은고려하지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는 과거 다른 극단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의 남자 역을 연기했었다고 했다. 당시 상대 배우가 아이 셋을 키우던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는데, 도무지 연기에 몰입할 수 없어 고생했다고 했다. 연출은 상대 여배우도 몰입하기 힘들었을 거라며 자조 섞인 농담도 했다. 이런 아쉬웠던기억 때문인지, 연출은 머릿속에 그려 둔 인물에 가장 적합한 배우만을 고수했다.
혹자는 외모에 치중한 캐스팅이 편협하다며 반박할 수 있다. 나도 연극 활동 초기엔 외모와 배역은 연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야말로 편협하고 허황된 발상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부지불식간 내면을 중시하면서 외면을 경박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다고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치고 내면을 보는 시야가 탁월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외면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 대다수는 시야가 좁아 내면조차 꿰뚫어 보지 못한다. 외면은 플러스 요인이지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다. 배우는 특히, 외면이라는 플러스 요인을 연기에 적극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아마추어 집단에선 내면 연기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사람이 적다. 설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외모에 걸맞은 배역을 연기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일례로 극 중 건달 역이 있다면, 외모가 거칠고 덩치가 큰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더 좋다. 물론 연기력과 분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외모까지 극 중 인물과 어울린다면, 관객의 배역 몰입도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첫인상을 3초 안에 결정하고, 그 결정을 특별한 인식의 변화가 발생하기 전까지 고수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배역의 첫인상으로 거의 모든 걸 판가름하며, 이때 배우의 외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 무대
이런 점에서 나는 연출의 여배우 캐스팅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얼굴, 체형, 목소리 등 여러 부분에서 극 중 인물과 맞아떨어졌다. 극 중 '남자'는 15년간 '여자'를 짝사랑해 온 상황이었다. 현실에서 15년이면,외모와 상관없이 상대 내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이런 가능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관객은 무대 위 배우를 보는 순간, 그 가능성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관객은 배우의 겉모습을 보고 3초 안에 판단을 끝낸다. (안타깝게도 내 외모가 받쳐주지 못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역할이었으니 납득되었기를 희망한다.)
나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만이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처음부터가능하지도 않다. 나는 외모가 어떻든 간에, 연극 무대에서 외모 또한 연기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끔 캐스팅에서 외모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목격된다. 하지만 실험적 성격이 다분한 극이 아니라면, 이런 처사는 지양해야 한다. 굳이 관객에게 불필요한 혼란과 생각거리를 줄 필요는 없다. 외모 또한 의상이나 분장처럼, 극 중 인물의 위치와 역할을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의감각과 인식은 단순할 정도로 직관에 의존한다.감각과 인식은 개인의 의도와 별개로 작동하며, 이것이 배우와 배역의 외모를 어느 정도 연결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