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훈 Jul 25. 2024

로맨스는 어려워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배우 중에는 극의 중심인물이 아님에도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사람이 있다. 극의 서사와 연관 없는 지점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연극 연기 초심자일수록 이런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데, 심지어 이런 행동이 잘못이라는 사실 모르기도 한다. 때로자신이 장면을 살렸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마치 피아노 솔로 파트에 드러머가 난입한 후, 자신이 곡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드러머가 살린 건 곡이 아니라 실낱같은 자기 자존감일 뿐이다.


'낄끼빠빠'라는 유행어가 있다. 뜻을 풀이하면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연극 무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신이 극의 중심 서사를 이끄는 게 아니라면, 알아서 잘 '빠져'주는  배우의 기본 덕목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배역이 할 법한 행동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오히려 목석처럼 가만히 있으면, 그 또한 나름대로 시선을 빼앗는 행위이다. 과장된 표현은 음의 형태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극의 중심 서사를 빼앗지 않는 선에서 조율에 신경 써야 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 대본을 읽은 후, 역할은 '여자'가 빛이 나도록 보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대본을 분석할 때 상대 배우에게 했던 말이기도 한데,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사교댄스의 파트너와 같다고 말했었다. 사교댄스에서 춤과 공연을 리드하는 사람은 남자이다. 그러나 무대 위 가장 빛이 나는 사람은 여자이다. 남자 댄서는 여자 댄서를 리드함과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넘겨줘야 한다. 훌륭한 댄스 공연은 대부분 이 공식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우정 사이'의 무대도 이 공식을 따를 때 완성도가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 커튼이 내려가면 관객 모두가 '여자'에게 흠뻑 빠지도록 말이다.


'여자'가 뭘 해도 즐겁기만 한 '남자'


그동안 나는 극의 중심인물이 아닐 때, 동작을 최소화하여 서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무대 위 중심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누가 대화를 주도하고 무대를 넓게 쓰는지를 보면 되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는 두 인물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나는 극의 중심인물임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조명을 비추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해본 적 없던 나는 그 방법을 몰라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히틀러의 책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히틀러는 참 희한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난 선동가가 청중을 현혹하는 방법을 이용해 보기로 다. 유능한(?) 선동가는 어떻게 청중을 선동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선동가는 자신의 주장을 진실로 믿는다.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청중의 마음을 휘어잡고, 종국엔 청중도 그 주장을 맹신하도록 유도한다. 선동가 내면의 확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행이, 청중의 무의식적 직관사로잡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선동가는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내가 맡은 역은 '여자를 15년간 짝사랑한 남자'였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대신, 실제 그 인물을 좋아해 버리기로 작정했다. 마치 선동가처럼, 내 행동과 말투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애정이 관객의 마음마저 동요시키길 바랐다. '남자'확신이 곧 '여자'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실제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많은 배우가 활용하는 연기 메소드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메소드보단 행동으로 감정을 끌어내는 쪽을 선호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처럼,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감정을 끄집어내는 방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메소드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마치 내 몸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연출은 실제 배우의 이름을 극 중 인물의 이름과 동일하게 설정했다. 그래서 '남자'의 이름은 '이일훈'이었고, '여자'의 이름은  권시유(가명)'이었다. 문제는 극 중 '이일훈'이 '권시유'를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다는 점이었다. 배역과 배우 이름이 일치하는 탓에, 고백하는 순간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붕괴되는 상황에 닥치기도 했다. 내가 맹신하고자 했던 감정은 '배역을 향한 사랑'이지, '배우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름을 부를 때 감도는 어색함을 무마시키려 눈을 깜빡이거나 키득거려야만 했다.


'남자'의 고백에 놀란 '여자'


여배우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이일훈'에게 고백받을 때마다 실소를 참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고백 장면에선 은은한 음악이 흘렀는데, 나중엔 이 음악이 들리기만 해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실실거리며 연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에겐 극을 선보여야 할 관객이 존재했다. 물론 관객은 관대하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실실거려도, 관객은 함께 웃어줄 포용력을 갖추었. 그러나 이런 모습은 관객에게도, 극을 쓴 원작자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본명을 부르며 고백하는 것도, 스무 번 정도 반복하다 보니 마음이 무디어졌다. 그런데 감정이 무디어지면 그 또한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이일훈'의 마음이 관객을 동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감정이 익숙함에 잠식되지 않도록 몇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중엔 연습 전 조용히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날만을 기다렸어'라며 수십 번 읊조리는 방법도 있었다. 실상은 거의 매일 하루 세 번씩 고백을 했지만, 가라앉는 감정을 막기 위해 자기 세뇌가 필요했다. (이 방법을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동기들은 이를 주제로 날 놀린다.)


나는 로맨스 극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로맨스가 생각보다 어려운 장르라는 사실이다. 가끔 TV에 보이는 선남선녀들의 로맨스를 보면, 연기 참 쉽게 한다고 생각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며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로맨스가 쉽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다. 장르마다 연기하는 데 있어 나름의 고충이 따른다. 어떤 장르는 절제를 요구하고, 어떤 장르는 과장을 요구하며, 또 어떤 장르는 조율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는 그동안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메소드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앞으로 어떤 장르에 도전하든, 그리고 극에 어울리는 연기 메소드가 무엇이든, '사랑과 우정 사이'는 내게 색다른 도전을 제시한 극이라는 점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전 13화 외모도 중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