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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Aug 08. 2024

배우가 아닌 단원으로서의 책임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는 [연극패 청년]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멘토멘티' 출품작이었다. '멘토멘티'는 극단 내 선후배 간 화합과 연기 및 극단 활동 노하우 전수를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위 프로그램에는 『사랑과 우정 사이』 외에도 출품작이 하나 더 있었다. 『귀신 들린 스피커』라는 극으로, 라디오 드라마 각본을 연극 대본으로 재구성한 1인극이다. 제목 그대로 스피커에서 귀신 목소리가 들린다는 설정이었는데,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 목소리 출연 배우가 남녀 각각 한 명씩 필요했다.


나는 목소리가 좋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특히 연극을 시작하면서 이런 칭찬을 자주 듣는데, 연극 바닥이 내 장점이 부각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20기 선배 한 명이 내 목소리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했다. 선배는 『귀신 들린 스피커』의 연출을 맡은 상황이었고, 목소리로 출현할 남배우를 물색 중이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날, 그가 무대 음향을 확인하러 공간을 방문했다. 내가 연습을 마치자 그가 말했다. "아, 일훈이 형 목소리 탐나는데요."


처음엔 평소와 같은 칭찬으로 알아듣고 멋쩍게 감사를 표현하려다, 무언가 다른 의도를 감지한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네? 갑자기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남자 목소리를 녹음해야 하는데 제 목소리로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형 목소리가 탐나네요." 보아하니 전부터 목소리 출현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나 또한 다른 극을 준비 중이었기에 망설였던 듯했다. 비록 목소리 녹음뿐이라 하더라도, 한창 연습 중인 배우의 시간을 뺏는 것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과 우정 사이』의 연출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귀신 들린 스피커』의 연출은 평소 촬영 및 녹음, 그리고 영상 편집을 도맡아 하는 단원이었다. 촬영 업계 종사자인 덕분에 질 좋은 장비로 극단의 모든 활동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었다.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취미 활동에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는 그런 노고를 전부 감당하면서도 생색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행동이라며 자신의 노고를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어선 안 된다. 누군가의 희생과 노고가 다른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될 순 없다. 크든 작든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귀신 들린 스피커』의 연출과 배우


그런데 그가 내 목소리를 녹음하길 원했다. 겨우 두 시간이면 끝날 작업인데, 그 정도의 시간조차도 못 내어준다면 자괴감이 들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랑과 우정 사이』 연출의 동의를 구한 후, 연습이 없는 날로 녹음 일정을 잡았다. 그렇게 나는 '멘토멘티'의 모든 공연(하나는 비록 목소리뿐이었지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귀신 들린 스피커』의 연출은 나에게 누차 감사를 표현했지만, 사실 내가 제공한 거라곤 기껏해야 두 시간과 원래부터 갖고 있던 목소리가 다였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세간엔 이런 말이 있다.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누구나 한 번 이상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구절이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사람들의 인식 개선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낮다. 실제 이 구절이 유명해진 이유가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아 자주 회자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된다면, 이런 구절이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 자체가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자신이 받는 호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자신이 베푼 호의는 대대손손 후대에 남기기라도 할 기세다.


물론 이는 인간의 기본 습성이나 다름없으므로 완전한 개선은 불가능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신의 눈과 손이 미치는 범주 안에서는, 공익을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주는 것이 옳다. 거창한 보상 같은 건 필요 없다. 꼭 물질적이거나 형식적인 보상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희생이 습관화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거창한 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 내면의 책임감은 무한 동력을 얻는다.


내가 한때 몸담았던 극단에서는 이런 문제가 종종 불거졌는데(사실 이는 두 명 이상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발생한다. 전에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를 떠올려보라), 얼마 전 들은 소식에 의하면 최근 이 문제가 큰 불화로 이어졌다고 한다. 누군가의 책임과 노고를 발판 삼아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극단 운영에 불가피한 힘든 업무를 기피한 사람이 있던 것이다. 단지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는 즉, 극단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면서 힘든 일은 다른 단원에게 떠넘기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다.


무대 작업은 힘들어


극단엔 '연극을 하고 싶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다. 연극 외에도 극단은 여러 '문화 및 사교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즐거운 일'에는 반드시 노고가 뒤따른다. 언제나 정리하거나, 조율하거나, 치워야 할 '수고스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놀기 위해 고생한다. 그런데 '즐거운 일'에만 얼굴을 들이밀고, '수고스러운 일'에는 일절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치 다른 단원의 고생이 자신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인 양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부류는 어쩌다 깨알 같은 수고라도 할 때면, 전단이라도 돌릴 기세로 생색을 낸다. 또한 티끌 같은 노고가 인정받지 못할 때면, 혁명이라도 일으킬 기세로 분노에 찬다.


위에서 언급했듯, 자신이 받은 혜택의 출처를 전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또한 이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내가 받은 혜택의 기원을 끝까지 파고들면, 결국 단군 할아버지까지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인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선, 조금만 둘러보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실로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책임감은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습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책임감이 우리가 응당 누려야 할 지지대가 되어선 안 된다. 그들은 공로를 인정받고 모두의 감사를 받아 마땅하다. 심지어 그들이 이를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자신이 직접 책임감을 발휘한다면 더욱 좋다. 아마추어 조직은 대부분 운영진이 따로 있더라도 수평적인 체계 및 관계를 표방한다. 그리고 수평적인 체계 내 모든 구성원은 각자 균등한 권리를 누린다. 권리는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균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은 균등한 책임이 부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아마추어 조직에 속한 구성원은 각자 나름의 주인 의식을 갖춰야 한다. 혹시 이 말이 '꼰대'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꼰대'라는 단어 뒤에서 자신의 불합리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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