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갑작스러운 사고, 불가피한 상황, 그리고 실수는 인간의 예측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와 같은 사유로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천재지변이 아닌 단순히 습관화된 지각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각 상습범들은 늦을 때마다 변명을 늘어놓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을 뿐이다. 이들은 지각의 폐해를 인지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지각 상습범들은 다른 방면으로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 여지가 크다.
이것이 내가 약속 시간을 자주 어기는 사람을 꺼리는 이유이다. 내게 피해를 줄 사람과 관계를 지속해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가끔 만나 술이나 한잔 기울이는 사이라면 문제없다. 사교 목적의 만남에까지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외의 상황이라면, 지각 상습범들과는 반드시 거리를 둬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집단에 피해만 끼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협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기피 대상 1순위이다.
연극은 협업이다. 1인극을 하더라도, 연출과 스태프 심지어 관객과도 협업해야 한다(관객은 연극의 3요소 중 하나이다). 때로는 본업이 아닌 취미라는 이유만으로 약속 시간을 어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현업에서도 약속을 어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선 티타늄 바가지가 될 리 없다. 더군다나 약속 시간은 애초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이지, 사람과 업무 간의 약속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습적 지각이 '본업이 아닌 취미'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저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취미가 현업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계가 유지되어야 취미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전 극단에서는 단원들의 열정이 과할 때 우스갯소리로 주고받던 말이 있었다. '극단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아요.' 수익이 없는 취미 활동에 몰두하느라 현업이 후순위로 밀리는 상황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난 이에 적극 동의한다. 그래서 때때로 퇴근 직후에 출발해도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하는 단원이 있는데, 난 이들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물리적 한계를 어떻게 초월하겠는가. 대신 그들의 평소 행실을 보면, 이것이 물리적 한계인지 아니면 단순 핑계인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다.
세간엔 시간에 관한 오해가 하나 있다. 바로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착각이다. 당연히 아인슈타인 덕분에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지식을 알고 있는 것'과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사이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누구나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대다수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시간이 인간과 동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개념인 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시간이 개인마다 각각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닌 개인마다 다르게 소유하고 있는 '자산'이다. 일례로 누군가 약속 시간에 10분 늦는다면, 우리 대부분은 10분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무의식적 착각이 유도한 현상이다. 그러나 실제 낭비된 시간은 10분이 아니라 (10 * 만나는 인원수)분이다. 예를 들어 열 명이 모이기로 한 장소에 누군가 10분 늦는다면, 낭비된 시간은 10분이 아닌 총 100분이 된다. 내가 열 명에게 10만 원씩 뺏는다면, 내가 뺏은 돈은 총 100만 원인 것과 같은 이치다.
독자 대부분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협업을 위해 모인 장소에서, 약속 시간을 어긴 누군가 때문에 업무 시작이 미뤄지는 경우를 말이다(엄밀히는 사교 모임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그에 따라 개인 자산이다. 그러므로 약속 시간을 어긴 사람은 자기 시간을 벌기 위해 남의 시간을 빼앗은 것과 다름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뺏을 수 있다는 건 그릇된 생각이다. 이런 착각 때문에 우리는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에서도 입을 꾹 닫는다. 물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산이 실시간으로 강탈당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이제 독자들은 왜 내가 이들을 '지각 상습범'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난 모든 상황에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다. 명분만 충분하다면 내 돈을 타인을 위해 쓸 수 있듯이, 명분만 충분하다면 내 시간을 타인을 위해 쓸 수 있다.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의 존재도 인정한다. 다만 누군가의 악습관 때문에 내 시간이 뜻하지 않게 낭비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누군가 당신의 자산을 교묘히 훔치고 강탈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신에게 좋다. 지각 상습범은 변명할 수 있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시간이 개인 자산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몰랐어요." 나는 되묻는다. "꼭 물리학과 철학을 알아야 약속 시간 준수가 상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연극은 여러 사람이 협업하여 완성하는 공연 예술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여기도 남의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강탈하는 지각 상습범이 있다. 그 탓에 협업은 지연되고 공연의 질을 더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당한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질 수 있었던 가능성을 더 아쉬워한다(그때 공부 좀 했더라면, 그때 코인을 샀더라면, 그때 그 여자를 만났더라면). 그래서 나 또한 공연을 마치면, '공연 수준을 더 올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에 짧은 한숨을 토하곤 한다.
협업이 중요한 활동에서 지각 상습범만큼 악질도 없다. 게다가 남의 시간을 속 편히 강탈하는 양심의 소유자라면, 다른 영역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크다. 여러분도 한번 떠올려보라. 특정 집단에서 구성원 모두가 기피하는 대상을 말이다. 구성원마다 기피하는 이유가 다르더라도, 기피 대상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상습적인 지각이다. '모든 지각자가 기피 대상은 아니지만, 모든 기피 대상은 지각자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직장인 극단 특성상 이런 사람을 사전에 거르기란 불가능하다. 대신 이런 부류의 활동을 제약하는 시스템은 구축할 수 있다. 물론 제약을 결정하기 전 심도 있는 논의와 민주적인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 제약이라는 강력한 무기는 언제든 사적 정치 도구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 팽배한 '회피형 착함'(해결이 아닌 회피를 목적으로 착한 사람의 탈을 쓰는 것)에 '취미 연극'이라는 특성이 더해져, 이런 문제들이 공론화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관망한다면,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가게 된다. 빗물이 홍수가 되는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리고 홍수는 예방하거나, 휩쓸리거나, 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