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시절을 함께 해준 구오빠들
나의 덕질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에픽하이 (EPIK HIGH)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나의 덕질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공감해 줄 것이다. 나의 첫 덕질의 시작점이자 10대 시절을 함께 했던 에픽하이. 다음 공식 팬카페에 가입해서 잠시 활동까지 했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던 그 덕질의 시작은 아마 2005년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에픽하이 정규 3집 <Swan Songs>의 타이틀곡 <Fly>의 무대였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한창 꿈을 좇던 10대 시절의 나에게 에픽하이의 <Fly>의 가사는 위로로 다가왔고, 그렇게 에픽하이에 대한 관심은 나를 HIGH SKOOL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당시에도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었고 그중 힙합곡을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에픽하이의 모든 노래 가사는 그때 당시 나에게는 ‘서사시’ 그 자체였다. ‘삶으로부터 마음으로, 마음으로부터 라임으로’ 본인을 소개한 타블로, ‘비트라는 백지에다 라임을 칠하는 미술가’ 미쓰라, 그리고 ‘거리문화의 지휘자’ 투컷까지. 인사부터 뭔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에픽하이는 “난 이 세상의 밑바닥이 아닌 밑받침”, “한숨은 쉬어도 내 꿈은 절대 쉬지 못해” 등과 같은 가사로 말을 건네며 혼란스러웠던 10대의 나에게 위로와 공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에픽하이의 정규 1집 <Map of the Human Soul>부터 정규 4집 <Remapping the Human Soul>까지 모든 노래 가사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울 정도로 에픽하이 노래에만 빠져 살았었는데, 그중 정규 4집의 타이틀곡이었던 <Fan>이 나올 당시에는 거의 에픽하이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과몰입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나서 뮤직비디오를 다시 봤는데 그때 당시에는 이 노래를 그저 너무나도 좋아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팬의 시선으로 해석해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야 집착으로 가득한 하드코어 팬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 그때 분명 내용을 몇 번이고 봤을 텐데 신기할 따름.
그 후 2009년 비정규 <魂: Map The Soul> 앨범까지 꾸준하게 에픽하이를 좋아하다가 자연스레 그다음 덕질 대상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에픽하이 신곡이 나오면 찾아 듣는 것은 물론 아직도 내 방의 책장에는 타블로의 첫 소설집인 <당신의 조각들>이 꽂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시절 좋아했었던 에픽하이 곡들을 하나씩 들어보는데 지금 들어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것이 나의 첫 덕질의 대상이 에픽하이였다는 사실이 조금 뿌듯해지는 느낌. 그 와중에 아직도 완벽하게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약간 놀라움 따름인데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그만큼 푹 빠져있었고 그만큼 많이 들었었던 에픽하이의 노래들.
최근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우산>이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노래를 듣자마자 비가 오던 날 그 노래를 듣고 있던 나의 10대 시절이 바로 생각나더라. 감정의 변화가 많았던 나의 혼란스러웠던 10대를 함께 해주었던 에픽하이는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첫 덕질의 예쁜 추억으로 남아있다. 감히 그 마음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들었던 시간을 묵묵히 버텨내고, 그렇게 버텨낸 시간들이 쌓여 벌써 20주년을 맞은 에픽하이. 아직도 좋은 곡들로 활발하게 활동해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는 10대 시절 좋아했던 오빠들의 존재를 넘어 함께 나이 들어가는 느낌. 앞으로도 그들만의 '서사시'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손길이 되어주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외쳐봅니다. 다 함께 A-B-C-D-E.P.I.K. 두 손가락을 위로 들고 평화!
괜한 한숨에 지워지는 단 한 번의 꿈, 몇만 번의 시도 위에 갈라서는 문. 눈을 뜨며 살아감에 보여 희망의 연기가, 모두 털어 날려버려 비관의 먼지 다. 역시 나도 때론 괜한 겁이 나, 천천히 가 왜 꿈을 쉽게 버리나. 때론 낮게 나는 새도 멀리 봐, 어두운 밤일수록 밝은 별은 더 빛나. - 에픽하이 <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