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임용 후 초임지에서 무리한 탓인지 몸은 더더욱 안 좋아졌고 나는 원인을 모른 채 매일 입병을 달고 살았다. 눈에 염증에 생겼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때마다 같은 병원을 다녔기 때문에 접수처의 부장님 직함을 다신 중년 여성 분이 가끔 걱정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나니 말이다. 다행히 스테로이드를 처방받고 나면 염증은 잠잠해졌지만 문제는 입안이 너무 헐어 삶의 짊이 최악으로 치닫고 말았다.
원래 태생적으로 병원을 잘 가지 않는 탓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구내염 심한 것 가지고 병원을 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알보칠과 친해지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큰 효과는 없었다. 물론 그건 내 몸 탓일 수도 있지만 알보칠이 약해졌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비타민B를 사와서 매일 먹으라고 하셨다.
아마 견딜만 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테지만 문제는 내가 그 견디는 속성이 꽤나 지나치다는 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는 게 패시브 속성이었다. 물론 성격이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멍청할 정도로 참을 때가 있다. 처음 입대하고나서 피를 뽑을 때였는지 모르겠는데 주사기가 빠져서 피가 새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냥 천장만 쳐다보고 참았었다. 팔 주위의 느낌이 이상했지만 내가 잘못 느꼈다고 생각하면서 외면한 것이다.
지금 아픈 것도 비슷했다. 그냥 죽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니니까 이걸 가지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다. 초임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육체도 육체지만 정신도 지쳤기 때문에 이른바 영혼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어릴 때 엄청 활발했던 아이가 집안에 큰 문제가 생기면서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했다. 달리 생각해보면 참지 않았다가 별 것 아니면 괜히 내가 부끄러워질 것 같은 게 컸다.
그러다 결국 병원을 한 번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마 사랑니 때문에 입이 벌어지지 않은 뒤였던 것 같다. 참을 만큼 참은 셈이었고, 나는 친구에게 병원을 물어봤다. 우리 지역에는 대학병원이 세 곳 정도 있었는데 직장에서 가까운 곳이 하나 있었고 친구는 나쁘지 않다며 교수를 한 명 추천해주었다. 나는 어디 병원의 어떤 교수가 괜찮은지 알 길이 없었으니 이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다.
나는 초임지에서 한동안 거의 매일을 야근했기 때문에 그냥은 병원을 갈 수 없었다. 병조퇴를 하거나 아니면 잠깐 나갔다 돌아와야 했다. 지금 MZ라고 불리는 세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자리를 비우면 비운 만큼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에 그냥 특별한 일 없으면 휴가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대학병원은 처음이었다. 원래 이렇게 대학병원을 한 번에 갈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인기가 많은 교수님같은 경우 진료를 보기까지 세 달은 걸리기도 했다. 다행히 직장과 가까운 대학병원은 그 정도로 인기가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머지 않아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친구는 본인과 같은 강직성 척추염을 의심했기 때문에 마아도 교수도 그쪽 전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증상을 들어보고는 아침에 일어날 때 허리가 뻣뻣하지 않냐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던 것 같아서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눕혀서 다리를 올려보거나 그런 몇 가지 진찰을 하더니 딱히 무슨 병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서 피검사를 하게 되었다. 염증 수치라든지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는지 등등을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딱히 뭐가 나오지는 않았다. 친구 같은 경우는 아마 어떤 유전자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유없이 일어나는 눈의 염증, 입의 염증이라는 증상이 있지만 뭐라고 확진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좋아질 수도 있으니 일단 약을 처방받고 주기적으로 진료를 빋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