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은 Apr 03. 2019

책리뷰<주홍 글자>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나다니엘(너새니얼) 호손 | 주홍 글씨, 청교도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다!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처음 <주홍 글자>를 손에 쥐었을 때,

가련하고 비참한 여인의 삶을 그린 소설일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호손의 손에서 육체를 덧입고 태어나

작품 속을 종횡무진 행진하는 헤스터 프린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한지!

여기, 들장미 꽃 한 송이가 있다.

꽃의 의미일랑 잠시 후에 일러줄 테니,

손에 쥔 장미꽃을 꼭 쥐어들고 헤스터 프린의 걸음을 따라가 보자.




| 배경읽기 | 청교도 신앙의 모순을 비판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

| 작품해설 | 엄숙한 청교도 사회에 던진 묵직한 비판




| 배경읽기 | 청교도 신앙의 모순을 비판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해봤을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답은 모든 사람이 다르게 내리겠지만, 신앙과 종교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고, 험난하고 어려운 인생에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의 이름과 신의 권위로 악행과 차별, 폭력이 자행되어 왔다.

<주홍 글자>의 작가인 너새니얼 호손은 18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호손은 <주홍 글자>의 서문 <세관>에서 고향 세일럼을 아끼는 마음을 밝힌다. 호손은 “내 가족이 이 땅에 오랫동안 깊이 뿌리를 박아 왔기 때문”에 세일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호손 가문의 선조 윌리엄 호손은 1630년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로 건너와, 1636년 세일럼에 정착했다. 호손 가문은 신대륙 식민지 사업 초기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 가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청교도인들은 구교의 권위주의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했고, 일부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순결한 신앙을 규율 삼아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개인의 자유를 옥죄곤 했다. 구교의 권위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떠나왔으면서, 자신들만의 또 다른 권위를 세운 것이다.

호손이 태어난 세일럼 지역은 그 후 200여 년 동안 청교도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너새니얼 호손은 청교도 신앙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특히 호손은 청교도 신앙의 모순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호손의 문장에는 통렬한 폭로와 비판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따스함이 녹아 있다.

그의 대표작 <주홍 글자>는 1642년~1649년까지 7년 동안 보스턴 식민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남편이 소식이 끊긴 사이 다른 남성의 아이를 가지는 ‘간음죄’를 저질러 평생 주홍 글자를 옷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 여성 ‘헤스터 프린’이다. 호손은 헤스터의 삶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서 잠깐, <주홍 글자>의 서문 <세관>은 매우 어렵고 딱딱하다. <주홍 글자>를 읽기 전에 <세관>을 먼저 읽으면, 자칫 호손을 오해하고 이 책을 멀리 던져버릴지도 모르니, <주홍 글자>를 모두 읽은 후에 <세관>을 읽기를 추천한다.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나다니엘 호손

1804년 7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을 즐겼고 대학에 다니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28년 첫 장편소설 <펜쇼>를 출간, 1837년에는 단편집 <두 번 들은 이야기>를 발표했다.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6년 세일럼 세관의 수입품 검사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3년 후 휘그당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직장에서 쫓겨난다. 이후 창작에 열정을 쏟으며 <주홍 글자>를 6개월 만에 집필한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세일럼, 마녀의 도시

청교도들의 도시에서는 죄Sin가 곧 범죄Crime를 의미했다. 실제 당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간음 사건을 사형, 채찍, 글자 낙인 등으로 처벌했다. 세일럼은 ‘마녀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다. 1692년 있었던 마녀 재판 때문인데, 이 재판으로 185명을 체포,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 작품해설 | 엄숙한 청교도 사회에 던진 묵직한 비판


혁명의 발끝에서 피어오르는 들장미를 따라

이제 영문도 모르고 손에 쥐어들었을 그 들장미가 어떻게 작품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겠다. 호손은 작품의 도입부, 헤스터가 갇힌 감옥 문 옆을 화려하게 수놓은 ‘들장미 덩굴’의 유래를 설명한다. 이 장미 덩굴은 여성 종교 혁명가 ‘앤 허친슨’이 감옥 문 안으로 들어갈 때, 그녀의 발바닥이 닿은 땅에서 솟아났다고. 호손은 헤스터를 일종의 혁명가로 묘사한 셈이다.

호손은 말한다. 이 꽃이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을 다룬 이 이야기의 어두운 결말을 좀 더 밝게 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고. 작품 속에서 길을 잃을 땐 잠시 멈춰서 들장미가 피어 있는 길이 어딘지 둘러보자. 그 길에서 사랑과 혁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헤스터 프린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첫 장면은 보스턴의 시장터. 주민들이 감옥 앞 처형대를 둘러싸고 있다. 감옥 문이 열리고, 죄인이 끌려 나온다. 죄인은 감옥 문턱 앞에서 관리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당당하게 처형대에 올라선다. 죄인 ‘헤스터 프린’은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있다. 그의 수수한 검은 옷 위에는 주홍빛 헝겊에 금테를 둘러 새긴 ‘A’자가 보인다. 옷에 새긴 ‘A’자는 간음Adultery한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다.

처형대에 선 헤스터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성이 있다. 그는 옆에 선 마을 사람에게 몇 가지를 묻고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때, 온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딤스데일 목사가 발코니에 나타나 헤스터에게 상대 남성의 이름을 밝히라고 호소한다. 헤스터의 품에 안긴 아이는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헤스터와 두 남자, 그리고 헤스터의 딸 펄의 이야기가 막에 오른다.



‘나쁜 사람’은 없어, 인간이 원래 나쁘다면 모를까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청교도인의 경전인 성경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어서 신과 멀어졌다고 말한다. 신은 왜 인간에게 ‘선악을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성경은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신)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어쩌면 신은 인간이 ‘판단과 심판’이라는 신의 권위를 침해할까 걱정했던 것은 아닐까?

‘나쁘다’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쁜 행동’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사적인 욕망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는 어떤가? 아니, 타인에게 얼마간의 피해를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죄값을 치르는 것을 넘어, 평생 죄의 노예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그 사람의 잘못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가?

헤스터는 감옥에서 나온 후 7년간 외딴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헤스터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살아왔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늘 가장 먼저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곤 한다. 사람들은 그런 헤스터를 점점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주홍 글자 ‘A’를 본래의 뜻대로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주홍 글자가 ‘능력Able’을 뜻한다고 했다. (중략) 주홍 글자가 마치 수녀 가슴 위의 십자가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주홍 글자는 그것을 달고 다니는 사람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지니게 하여 온갖 위험 속에서도 무사히 걸어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헤스터가 천사보다 더 천사 같은 존재라고 해도, 헤스터가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마다 주홍 글자는 무시무시하게 불타올라 사람들과 헤스터 사이를 멀찍이 떨어뜨려놓는다. 주홍 글자는 ‘간음한 여인’의 표식임을, 그러니까 헤스터는 ‘죄인’, 즉 ‘나쁜 사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쁜 사람’과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어디에서나 헤스터가 서 있는 둘레에는 흔히 그러하듯이 작은 빈 공간이, 일종의 둥근 마법 지대가 생겼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뭇사람이 서로 밀치고 덮치고 하면서도 그 원 속에는 누구 하나 감히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빈 공간은 주홍 글자가 숙명적으로 그것을 달고 있는 장본인을 감싸고 있는 도덕적인 고독을 보여주는 강력한 표상이었다.


선과 악을 심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이 스스로 ‘나쁜 행동’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법도, 규칙도 없는 혼란 속에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 한 ‘개인’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힘을 잃고 오직 ‘나쁜 사람’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재발견된다. 아무리 헤스터가 선한 행동을 많이 했어도, 그녀는 결국 ‘주홍 글자’를 단 ‘나쁜 사람’에 불과했던 것처럼.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깡그리 당신 뒤에다 버리셔야 해요! 당신의 파멸은 그것이 일어났던 이곳에 그냥 내버려 두세요!” (중략)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어요! 무엇 때문에 그 과거를 저버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거지요?”


헤스터는 자신과 함께 간음을 저지른 남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파멸은 그것이 일어났던 이곳에 그냥 내버려 두라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해보자. 헤스터는 ‘나쁜 사람’인가? 남자는 ‘나쁜 사람’인가? 한번의 간음이 평생의 낙인이 되어 이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주민들에게는 헤스터의 죄악의 징표를 매 순간 눈으로 확인할 권리가 있을까?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나쁜 행동’은 있을지 몰라도,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반대로 모든 인간이 아주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모든 이들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주홍 글자

어떤 한 인간이 악한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인간이 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청교도 신앙의 근본적 교리와 연결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증언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해방’ 곧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헤스터는 죄인의 징표인 주홍 글자가 자신에게 해방과 교훈을 주는 스승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이 징표가 저에게 가르쳐 주었지요. 지금도 날마다 가르쳐 줍니다. 비록 저한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제 아이를 더욱더 똑똑하고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를 교훈을 말입니다.”
주홍 글자는 다른 여성들이 감히 밟을 수 없는 곳으로 찾아가도 좋다는 통행권과 같았다. 치욕, 절망, 고독! 이런 것들이 그녀에게는 스승이었다.


이쯤에서 다른 인물을 한번 등장시켜야겠다. 처형대에 선 헤스터 프린에게 엄중하고 따뜻한 천사의 목소리로 간음한 남성을 밝히라고 권고하던 딤스데일 목사. 딤스데일 목사는 헤스터 프린이 처형대에 선 그 날 이후, 가슴께에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 안색이 어두워진다. 7년 후 어느 날 밤, 딤스데일 목사는 발길을 옮겨 헤스터 프린이 섰던 처형대 위로 올라선다. 딤스데일 목사가 바로, 7년 전 헤스터 프린의 옆에 섰어야 할 ‘간음한 남성’이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처형대에 선 딤스테일 목사.


“교회당 안에 있는 성자와 같은 목사! 시장터에 서 있는 주홍 글자를 달고 있는 여인! 아무리 불경스러운 상상력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그 누가 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불타는 치욕의 낙인이 찍혔으리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었으랴!”


호손의 말처럼, ‘착한 사람’ 안에도 ‘나쁜 사람’과 같은 악의 씨앗이, ‘나쁜 사람’ 안에도 ‘착한 사람’의 징표인 선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아주 신성한 목사에게도 헤스터와 같은 주홍 글자가 있다고. 그리고 준엄하고 엄격하게 신의 말씀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모든 청교도인들 마음속에도 똑같은 주홍 글자가 있다고. 호손은 작품을 통해 말한다.

겉으로 순결한 척하는 것은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상 어디에서나 진실을 볼 수 있다면 헤스터 프린의 가슴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주홍 글자가 타올라야 한다고, 호손은 설득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그렇다면 지금까지 설명하지 않은 마지막 인물, 군중 속에서 주름진 얼굴로 헤스터를 바라보던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바로 2년간 사라졌던 헤스터의 남편이다.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헤스터에게 간음을 한 상대가 누구냐고 묻지만, 헤스터는 “절대로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라고 답한다. 헤스터는 딤스데일 목사가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져 고통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의사였던 로저 칠링워스는 딤스데일 목사를 간호하다가 그의 아픔이 육체적인 문제가 아님을, 딤스데일 목사의 가슴에 헤스터 프린과 같은 주홍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칠링워스는 딤스데일 목사의 주변에 7년간 머물며, 그의 영혼을 주무르고 괴롭힌다. 칠링워스가 목사의 가련한 마음을 파고들수록 칠링워스는 점점 잔인하고 교묘한, 냉담한 인물로 변해간다.

시간이 흐르고, 헤스터의 고백을 들은 딤스데일 목사. 자신을 돌보던 의사 칠링워스가 사실 자신의 친구가 아닌 원수임을 알게 된 딤스데일 목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헤스터,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은 아니오. 심지어 타락한 목사보다도 더 흉악한 죄인이 한 사람 있소. 그 사람의 복수야말로 내 죄보다도 더 무서운 죄요. 냉혹하게도 그 사람은 신성한 인간의 마음을 범했소. 헤스터, 당신과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소!”


마지막 순간, 목사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일으켜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형대 위로 올라간다. 천사 같은 목사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 글자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헤스터는 쓰러져가는 목사를 부축한다.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신 여러분! 저를 성스럽다고 생각해주시던 여러분! 저는 7년 전에 마땅히 섰어야 할 이곳에 지금 섰습니다. (중략) 그 여자의 주홍 글자는 신비롭고 무섭지만 사실 그것은 이 사내가 가슴에 지닌 낙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신의 붉은 낙인인 이것조차 깊은 가슴속을 불태워 온 징표에 지나지 않지요!”


성경의 한 유명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데리고 온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는 길이 남을 명대사를 뱉는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호손은 <주홍 글자>를 통해 청교도 신앙의 본질인 ‘이웃을 향한 용서와 사랑’을 잊지 말자고 소리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호손의 따스한 손길에 생명을 얻어 1600년대 보스턴을 거닐던 네 사람은 이제 주홍 글자와 함께 책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때때로 독자의 부름에 응답해 일어나, 청교도가 미국을 향하기 1600년 전, 고대 근동 지방을 거닐던 예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주홍 글자>를 읽는 이마다, 마음속 주홍 글자를 마주하는 신의 은총이 있기를.

end.



헤스터, 종교 혁명가이자 여성 혁명가!

<주홍 글자> 분석의 주요한 갈래 중 하나는 ‘페미니즘적 읽기’다. 2007년 작품(민음사)을 옮긴 김욱동 교수는 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홍 글자>는 사회의 규범이나 인습에 반항하는 주인공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 그것도 외딸을 키우는 어머니를 내세운 점에서 다른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헤스터 프린은 이 무렵 청교도 사회 못지않게 서슬 퍼런 가부장 질서에 도전하려고 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헤스터는 “가장 행복한 여성일지라도 여성으로서의 삶이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청교도의 전형적인 여성차별적 모습 또한 폭로한다.

김욱동 교수의 말에 따르면 헤스터 프린의 페미니즘적 태도는 19세기 중엽 보스턴과 콩코드에서 활동하던 여성운동가 ‘마거릿 풀러’와 비슷하다. 호손은 콩고드에 거주할 때 풀러와 실제로 교제하기도 해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제공한다고.


살아있는 주홍 글자

“아이의 모습은 다른 형체를 갖춘 주홍 글자요, 살아 숨 쉬는 주홍 글자가 아니던가!” 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홍 글자는 바로 헤스터의 딸 펄이다. 펄은 작중에서 말할 수 없는 주홍 글자를 대신해 말하기도 하고, 청교도 사회의 경직된 사상에 분노하기도 하고, 천사 같은 목사와 죄인 헤스터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 사람들은 펄이 ‘악마의 자식’이라고 수군대지만, 헤스터는 펄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품 속, 헤스터와 딤스데일 목사가 숲속에서 마주한다. 주홍 글자를 옷에서 떼어낸 헤스터를 보자 펄은 씩씩대며 헤스터를 노려본다. 이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은 딤스데일 목사가 이마에 입을 맞추자 냇가에 그 흔적을 박박 씻어낸다. 펄은 죄가 가져온 숙명적인 고통을 이해하고 감내할 때 피어나는 사랑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주홍 글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리뷰 <깊은 강>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