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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은 Apr 03. 2019

책리뷰 <깊은 강>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미

엔도 슈사쿠 | 깊은 강의 슬픔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미

돈이 없는 자는, 아주 멀리서부터 오래도록 갠지스 강을 향해 걷는다.

다리를 질질 끌고, 눈물을 흘리며….

부자도, 불가촉천민도, 모두 검은 재가 되어 갠지스 강에 동일하게 뿌려진다.

정결과 재생의 힘을 지닌 그 깊은 강은, 모든 영혼을 받아들이고 제 길을 묵묵히 흘러간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깊은 강으로 나아간다. 저마다의 아픔, 저마다의 삶을 지고.  



| 배경읽기 | 인간성의 심부를 꿰뚫는 작가, 엔도 슈사쿠

| 작품해설 |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미




| 배경읽기 | 인간성의 심부를 꿰뚫는 작가, 엔도 슈사쿠


“신이 있다면 왜, 이 세상에 전쟁과 기근과 굶주림, 고아와 억울한 사람이 끊이지 않는 거야?” 내가 물으면, 누군가는 “그러니까 신은 없는 거야!”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거기에도 신의 뜻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깊은 강>을 읽은 후, 처음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을 얻었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안 건 <깊은 강>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또 하나의 역작 <침묵>을 접했을 때다. 일본의 가톨릭 핍박을 배경으로 한 소설 <침묵>을 읽으며,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호흡이 무거워지고 심장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이렇게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마치 등장인물들이 실존인물이고, 그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엔도는 1966년 <침묵>을 집필했고,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3년 죽음을 3년 앞두고 병상에서 <깊은 강>을 완성했다. 엔도는 자신이 죽으면 <침묵>과 <깊은 강>을 한 권씩 관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고, 잠들어 있는 엔도의 곁을 지금도 두 작품이 지키고 있다.

엔도는 <<깊은 강> 창작 일기>에 ‘<깊은 강>에 나의 많은 부분들이 삽입되어 있다’고 적었다. <깊은 강>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엔도의 내면을 조금씩 빼어 닮았다. 그래서일까, <침묵>을 읽을 때와 비슷한, 아니 더욱 섬세하게 인간 내면을 훑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엔도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고통 속,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서구의 가톨릭 신앙이 어떻게 일본인에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엔도는 간단하게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 독자들은 다정하면서도 굵은 문장들을 따라 인간 본연의 질문 가운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다.

이 책을 단순한 ‘종교 소설’이라 오해할까 두렵다. 이 책(민음사, 2007)을 옮긴 유숙자 박사는 작품 해설에서 “빼어난 문학이 으레 그러하듯 엔도 슈사쿠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쓴 종교소설이라는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특정 종교의 벽에 갇히지 않고 이를 가뿐히 뛰어넘어, 보편적 삶과 내밀한 인간성의 심부를 꿰뚫는 깊은 통찰력으로 독자들을 흡입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과 신, 생과 죽음, 사랑과 생명, 고통과 아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엔도의 작품을 함께 살펴보자.



엔도 슈사쿠えんどうしゅうさく

1923년 도쿄에서 출생했고, 만주 다롄 지방에서 자랐다. 10대에 귀국한 후 게이오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프랑스 현대 가톨릭 문학에 관심이 많아, 애독서인 <테레즈 데케이루>의 배경이 된 프랑스 랑드 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954년 첫 평론집과 소설 <하얀 사람>을 발표했고, 1955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다. 이후 <바다와 독약> <성경 속의 여성들> <내가 버린 여자> 등을 집필했다. 1966년에 공개한 <침묵>이 큰 인기를 얻고, 인생 중년기에는 갠지스강, 아우슈비츠 등을 돌아보며 인간의 고통과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키워나간다. 1992년 <깊은 강> 초고를 완성했고, 1993년 복막 투석 수술을 하면서 <깊은 강>을 간행한다. 3년 후 폐렴으로 생을 거둔다. 현재 나가사키 현 소토메 ‘석양의 언덕’에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있다.




| 작품해설 | 인간의 고통과 신의 의미


“에나미 씨는 어째서 인도에 유학하게 됐습니까?”
“결국은, 반했기 때문이죠. 인도는 한 번 왔다가 철저하게 기피하는 손님들과, 자꾸자꾸 오고 싶어 하는 손님들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넘실넘실 흐르는 갠지스 강, 형형색색 옷을 입은 사람들, 깊은 눈망울을 가진 소년 소녀들, 춤과 노래, 코를 찌르는 향신료, 느긋하게 걷는 소, 신들에게 합장하며 묵직하게 감은 눈꺼풀….

인도를 상상하면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걸러지지 않은 신비로움. 드립 커피를 내리듯 ‘신의 세계’라는 가루를 여과지에 걸러 추출한 것이 ‘세상’이라고 한다면, 인도는 신이 실수로 그 가루를 뭉텅이로 쏟아버려 만들어진 나라가 아닐까. 신의 체취가 코앞에서 느껴지는 나라, 인도.

<깊은 강>의 배경은 인도다. 단체 관광에 참여해 만난 네 사람은 저마다 깊은 속사정을 안고 인도를 찾았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 내면의 공허함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은 갠지스 강 앞에서 위로와 구원을 맛본다. <깊은 강>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래의 네 사람이다.


● 이소베 

아내가 죽고 슬픔과 헛헛함을 느끼는 가부장적인 일본 남성. 아내를 추억하며 “당신이 두 손 벌려 막아 주었던 죽음은, 당신이 없어지자마자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라고 되뇐다. ‘일본에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소녀’를 찾아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미쓰코

삶의 진실을 너무 깊이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의 심연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여자. 대학 시절 숙맥 남학생 오쓰를 꾀어 관계를 가지면서 신밖에 모르던 그가 헐떡이며 가슴께를 오르내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골프나 사업 얘기밖에 모르는 남편을 경멸하는 식. 그러나 어쩐지 대학 시절 동창생 오쓰가 계속 눈에 밟힌다. 신부가 된 오쓰를 찾아 갠지스 강을 향한다.

 누마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 이야기를 쓰는 동화 작가. 폐렴으로 누운 누마다에게 아내는 구관조를 선물했다. 누마다의 수술 날, 아내가 깜빡 잊고 옥상에 놓아둔 구관조는 죽어 있었다. 반면 누마다는, 어려운 수술에서 살아남았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의 생을 대신한 것이라 믿는다. 은혜 갚는 까치의 심정으로, 인도의 자연보호구역을 찾아 떠난다.

● 기구치

기구치는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굶주림과 고통이 널브러진 ‘죽음의 거리’에서, 기구치는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진다. 그때, 전우 쓰카다가 다가와 고기를 건넨다. 시간이 흐르고, 병을 얻은 쓰카다. 쓰카다는 자신이 가져왔던 고기가 다른 전우의 시체였다고 밝힌다. 병원의 외국인 봉사자 ‘가스통’씨에게 쓰카다는 묻는다. “죽은 병사의 고기를 … 먹었어. 당신의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는가?” 가스통은 매일같이 쓰카다를 찾아와 위로한다. 기구치는 함께 죽음의 거리를 걸었던 전우들과 적군들을 생각하며 인도로 향한다.



양파라는 이름의 신神

열 살 때 가톨릭 세례를 받은 엔도 슈사쿠는 늘 가톨릭 신앙을 ‘맞지 않는 양복’이라고 칭했다. 엔도의 고민은 가톨릭 신부이면서 ‘범신론’적인 사상을 지녀 ‘이단아’ 취급을 받는 미쓰코의 동창생 오쓰에게서 잘 드러난다. “유럽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명석하고 너무나 논리적인 탓에 동양인인 내게는 뭔가 간과되는 듯해서 뒤쫓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종종 무신론자인 친구와 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세 치 혀로 설명되지 않는, 그럼에도 내가 느낀 무형의 무언가를 끄집어내 설명하려 애썼다. 나는 대략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랑과 위로, 따스함 따위가 내가 생각하는 신의 ‘표상’이라고.

친구는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에게 신은 고양이였다고. 어두운 밤,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곁을 지켜주던 고양이, 포실하게 만져지는 뱃살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과 보드라움. 어쩌면 그것이 신일 수 있지 않겠냐고.


“신이란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세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닭살 돋고 어색하다면, 생명의 따스함이라도 좋아요, 그렇게 부르세요. 그게 싫으면 늘 하던 대로 양파라도 좋아요.”


오쓰가 설명한 신에, 친구가 말한 신이 겹쳐 보였다. 신을 ‘양파’라고 불러도 된다는 말처럼, 신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신은 우주 어딘가를 배회하며 세상을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번개를 쏘아 보내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에 깃든 ‘사랑과 생명의 덩어리’다.

신을 떠올리면, 우리는 인간 밖의 어떤 초월적 존재를 상상한다. 그러나 신은 어쩌면 선악이 혼재한 인간 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연 안에 깃들었을지 모른다. 인간의 껍데기를, 자연의 겉모양을 벗어던지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과 생명의 덩어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신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앙은 ‘확실’보다는 ‘불확실’에 가깝다. 오쓰는 눅눅한 침대 맡에 누워 간디의 어록집을 읽는다. “모든 종교는 똑같은 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종교이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성경도, 불경도, 코란도, 진리가 담긴 뿌연 유리구슬일 뿐 진리 자체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쓰의 머뭇거림이 파리 신부들의 확신에 찬 태도보다 더 신실하게 느껴진다.



신, 인간의 고통에 스민…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또 다른 인물로 넘어가며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병원’이 한 번씩 등장한다. 이소베는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다. 미쓰코는 자원봉사자로 일했는데,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사랑의 고갈’로 인해 ‘사랑을 연기하는’ 짓이었을 뿐이다. 누마다는 폐렴으로 기관지 수술을 받고, 기구치는 병상에서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저마다 고통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인도에 도착한 미쓰코는 오쓰를 찾아 헤맨다. 가톨릭 신부 오쓰는 힌두교도의 옷을 입고, 땅에 쓰러져 죽어간 불가촉천민을 업어 갠지스 강으로 인도한다. 미쓰코는 오쓰를 만난 후, 갠지스 강물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간다. 미쓰코는 말한다. “믿을 수 있는 건,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영원과 순환을 상징한다. 힌두교인들은 흐르는 갠지스 강물에 뿌려지면 자신 또한 구원과 환생을 얻으리라 믿는다. 물은 정화와 회복의 이미지다. 힌두교인들은 강에서 몸을 씻고 정결 의식을 하며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낸다.

모든 사람은 고통과 고난, 고뇌를 가지고 강으로 나아간다. 꼭 갠지스 강처럼 형체를 가질 필요는 없다. 엔도는 고통을 가지고 나아와 구원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강이 한 줄기 흐른다고 말한다.

고통과 죽음, 생과 사랑을 탐구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 안에 흐르는 강을 찾는다. 그 강에서 마주하는 신은 예수일수도, 붓다일수도 있고, 혹은 양파나 고양이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분명 강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고통의 순간에 찾아온 나의 피에로

일행은 힌두교 신상이 모셔진 습하고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 ‘차문다 여신’ 앞에 멈춘다. 묘지에 사는 차문다 여신은 시체를 발치에 두고, 쭈그러진 젖가슴을 아이들에게 내주어 젖을 먹인다. 문둥병 걸린 오른발과, 허기진 뱃가죽과, 전갈이 물어뜯는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고 서서.

오쓰가 믿는 양파는 어떨까? 양파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과, 과부들과 함께했고 십자가에 달렸다. 기구치가 믿는 붓다도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로 들어서, 굶주림과 고통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더럽고 병든 이들과 고통 받으며, 그 가운데 생명을 낳는 힘. 그것이 바로 신의 진정한 모습 아닐까?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는 신(그 무엇이든)의 힘(사랑)은, 신을 본받아 살아가는 구도자의 삶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그리고 <깊은 강>에서는, 구도자의 모습을 ‘피에로’에 빗대 표현한다. 네 명의 등장인물에게는 각자의 고통의 순간에 찾아온 ‘피에로’가 하나씩 있다.

이소베에게는 아내가, 미쓰코에게는 오쓰가, 누마다에게는 구관조가, 기구치와 쓰카다에게는 가스통이 피에로였다. 이소베는 아내를 당연하다 여겼고, 미쓰코는 오쓰를 비웃었고, 누마다는 하하하 웃기만 하는 구관조를 우스꽝스럽다 생각했고, 기구치는 가스통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피에로들은 사라지면서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어쩌면 허깨비일지 모른다. 미쓰코도 그렇게 생각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증오가 불타고, 굶주림이 도사린 세상에서, 오쓰가 믿는 양파의 사랑 따위는 무력하다고.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신을 발견한다. 생의 무게를 대신 지고 있던 아내에게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등을 내어주는 동창생에게서, 인간보다 더 깊이 내 마음을 이해하는 구관조에게서, 아무 연고도 없으나 매일같이 병실에 찾아와 고통 받는 환자 옆에 무릎 꿇던 봉사자에게서.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오쓰라는 이름의 피에로다. 오쓰는 신부복을 벗어던지고 힌두교 옷을 입고, 기꺼이 불가촉천민들을 온 등에 들춰 업는다. 창녀촌에 드나들며 시체를 운반해 얼굴에 부스럼이 난 상황에서도, 오쓰는 그저 양파를 생각하며 웃어 보일 뿐이다.


 “그 사랑을 위해 구체적으로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사랑을 보여 준 양파의 일생에 대한 신뢰이다. 이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안에서 한결 튼실해져 가는 느낌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고통 속에서만 피어오른다. 구도자의 삶이 빛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빛나는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더럽고 누추한 인간의 죽음과 곁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미쓰코는 죽어가는 이들을 운반하는 또 다른 수녀들을 만난다. 미쓰코는 묻는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수녀는 대답한다. “그것밖에……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저희들은.”

<깊은 강>의 네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고통을 지고 깊은 강으로 걸어와 저마다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들처럼, 사랑과 생명의 거대하고 영원한 덩어리에 다가가려는 모든 자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흐르는 깊은 강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엔도는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nd.



‘깊은 강’의 두 가지 의미

<깊은 강>을 펼치면, 흑인 영가 한 편을 먼저 만날 수 있다. ‘깊은 강, 신이여, 나는 강을 건너, 저 그리운 곳으로 가고 싶어라.’ 이 영가는 흑인 노예들이 고통과 억압 속에서 고향을, 혹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부른 노래다.

<깊은 강>의 배경은 갠지스 강이다. ‘깊은 강’은 표면적으로 갠지스 강을 의미하지만, 엔도가 말한 ‘깊은 강’은 건너편의 그리운 곳(고향·하늘나라)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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