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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Jul 27. 2022

2화_서울에서 누렁이를 키우면 생기는 일

미워해도 소용없어

복주의 탈출 사건을 계기로 나는 훈련을 접고 개와 매일 놀기 시작했다. 훈련이고 뭐고 일단 복주랑 친해지기로 했다. 복주가 나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길 바라면서 매일 함께 산으로 들로 다녔다. 그러면서 틈틈이 동물행동학 관련 공부를 했다. 그중 가장 도움을 받은 건 ’EBS 방송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 에 나오는 설채현 수의사의 유튜브 강의였다. 일단 개에 대해 알고 싶었고 개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 설채현 선생님을 포함한 여러 개 훈련 전문가에게 상담도 받았다.


우리 복주의 경우 임보 시절에 캔넬에 오래 있었기에 캔넬에 들어가는 걸 싫어한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캔넬을 편하게 느끼는 해탈이 와 다르게 캔넬 안에서 굉장히 불안해한다. 이 얘기를 설채현 선생님께 했더니, 캔넬링을 하는 게 좋기는 하지만 복주처럼 캔넬에서 스트레스받는 개가 있다면 안 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할 때는 따로 와서 약 처방을 받으라 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지극히 타당한 해결책이라 느꼈다.  


사실 반려견의 문제 행동이라는 건 인간의 기준에서 문제이지 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때가 많다. 복주의 분리불안 역시 복주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낯선 환경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복주가 나와 내 집에 익숙해질 시간이 먼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평소에도 나는 사는 동안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믿는다. 개 역시 마찬가지다. 단박에 고쳐지는 개들의 문제 행동은 없다. 뭐든 꾸준히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산책 역시 마찬 가지다. 처음부터 산책 잘하는 개는 없다. 산책은 개와 인간의 호흡이다. 시간을 갖고 계속 서로 맞춰 가는 거다. 복주도 처음엔 줄을 끌었다. 그러다 차츰 알게 됐다. 천천히 걸어도 충분히 냄새 맡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줄을 끌어도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자신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이 또한 복주가 침착한 천성의 개라 가능한 얘기다. 성격도 급하고 기운도 좋은 해탈이의 경우는 복주와 다르다. 이 친구는 여전히 나를 풀숲이나 야산으로 끌고 가려한다.


분리불안은 둘째치고 타고난 기질 자체가 불안한 복주는 어려서부터 외부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눈앞에 비닐봉지만 하나 날아가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타고나길 무던한 해탈이는 다르다. 퍼피시절 배변훈련을 하려고 쳐 놓은 울타리도 이마로 밀고 다닐 정도로 이 친구는 겁이 없다. 청소기를 돌리면 꼬리를 말고 안절부절못하는 복주와 다르게 해탈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배를 까고 잔다. 그런데 뜻 밖에도 그렇게나 내 속을 끓이던 복주의 분리불안 문제는 해탈이 가 집에 오고 나서 기적처럼 사라졌다. 말하자면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졸리면 자고 신나면 노는 해탈이를 보면서 복주도 점차 ‘저래도 되는구나’를 배워 나간 거다. ( 모든 개가 둘째를 본다고 분리불안 증상이 좋아지는 건 아니니 둘째를 들일 땐 전문가와 꼭 상의하세요)


차차 개들과 함께 사는 삶에 익숙해지니 나 역시 정서적으로 점차 안정되어 갔다. 왜냐 실외 배변을 선호하는 개랑 살다 보니 눈 뜨면 무조건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미래의 일을 앞당겨 걱정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되짚어 보는 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개랑 매일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안 쓰던 몸의 근육을 쓰니 어찌나 피곤한지 약을 따로 먹지 않아도 밤에 눈만 감으면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잤다.


개와 함께 살다 보니 확실히 전보다 많이 웃는 사람이 됐다. 인정하기 싫지만 선생님 말이 맞았다. 내겐 누구보다 개가 필요했다. 일단 하긴 손바닥만 한 화분에서 식물이 자라고 꽃을 피워도 신기하고 기쁜 게 사람마음인데 나와 눈을 마주치고 숨을 쉬고 걷고 뛰는 존재가 점점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물론 아이에 비해서는 대할 바 없겠지만 경험해 보니 개가 주는 기쁨도 만만치는 않았다. 이는 학계에서 이미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반려동물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 준다)_Allen (2003)의 연구에서 반려동물효과(companion animal effect)는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을 통해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을 빠르게 하고 사회적 지지를 제공하여 심리적·신체적·사회적 만족감을 높게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Burch & Fine(2000)의 연구에 따르면 반려동물 중 반려견은 특히 무조건적 사랑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외 여러 연구를 통해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복주랑 함께 산책을 나서는데 골목 어귀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다. 그런데 그분이 복주하고 나를 번갈아 보고는 인상을 쓰며 "아침부터 재수 없게"라고 했다.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살피니 역시나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저 혐오는 나와 복주를 향한 게 분명하다. 아니 왜? 대체 왜?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다. 복주가 자라면 자랄수록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복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동네 이웃은 내게 이런 조언도 했다. '뭐 하러 이런 개 기르느라 고생이냐. 얼른 내다 버리고 요 밑에 가게 내려가서 작고 이쁜 놈 하나 사다 길러라. 얼마 안 한다. 글쎄, 실제로 내가 실제로 유기견을 키우게 된 건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돈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펫숍의 개들을 보는 일이 언제부턴가 불편했기에 유기견을 키우게 된 거다.


개를 키우기 전에 나는 내가 개를 좋아하니 남들도 다 개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솔직히 이 정도로 사람들이 개를 특히 큰 개를 싫어하는 줄 상상도 못 했다. 정말이지 서울에서 중·대형견을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마치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꺼내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랄까. 많은 이들이 우리를 지나치게 경계했다.

그도 그럴게 이미지는 강렬하다. 한국에서 그간 소비된 진돗개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을 무는 개다. 아마 어려서 시골집에 종일 묶여 사람만 보면 위협적으로 컹컹 짖던 진돗개의 모습을 다들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말이다. 개 역시 편하고 행복한 상황에선 사람을 향해 소리 높여 짖지도 않고 무턱대고 물지도 않는다. 일 미터도 안 되는 줄에 묶여 노상 밖을 보고 있으니 종일 할 수 있는 게 집을 지키는 일이었을 뿐인 거다.  그런데 사회적 인식이 이러니 반려 초반에는 복주를 데리고 나가면 어디서든 환대받지 못했다. 그게 참 슬펐다.




이는 복주를 입양하기 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니는 구간과 시간대를 골라 산책을 다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사람이 많이 오가는 동네 산책은 이웃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복주를 차에 태우고 서울 외곽으로 다녔다. 그나마 서울을 벗어나면 상황이 좀 나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가 프리랜서라고 쓰고 반백수라고 읽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서울에서 큰 개를 키우는 일은 개가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를 기르는 것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덕분에 복주와 함께 살며 전에는 크게 관심 없던 혐오와 차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남들이 미워하는 개를 키우고 나서야 이 땅에서 소수자들이 겪는 혐오와 차별이 더욱더 사실감 있게 다가왔다. 개를 통해 생각이 확장 됐다고 해야 할까. 이건 개가 내게 준 의도치 않은 크나 큰 선물이었다. 우리 개한테 재수 없다고 해도 하루 종일 내 속이 문드러지는 것처럼 상한데 이런 일을 단지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겪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요즘은 누가 우리 개들을 미워하면 크게 대거리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내가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린다고 해서 이들 인식에 자리한 오랜 혐오가 하루아침에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배격하면 할수록 그들의 혐오는 공고해질 것이다. 그래서 너는 떠들어라 나는 갈 길 간다. 하고 가던 길 간다. 왜냐면 이만치 살다 보니 그런 일에 끄달려 신경 쓰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항상 맘 껏 미워해라. 그러는 당신 입 아프지. 내 귀 아픈 거 아니니까.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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