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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Dec 08. 2019

어느 목요일 일기

가벼운 마음으로 명동에 갔다가, 다리가 아파서 성당에서 잠시 쉴라고 명동성당 갔는데, 하필 이런 걸 볼게 뭐야, 어쩔 수 없이 죄 많은 나는 자석에 끌리듯 고해소에 가 무릎을 꿇었다.


 나: 하느님을 원망하고 멀리하고,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신부님: 왜요?
 나: (동공 지진) 제가 힘들 때, 절 모른 척하시는 거 같았어요.
 신부님: 어떻게요?
 나: (2차 지진) 어쩌고 저쩌고 이러고저러고
 신부님: 성경 속 예언자들과 사도들 보시면 알겠지만, 그들의 삶이 순탄했나요? 하느님을 믿어서 내 현실이 바뀌는 건 없습니다. 현실을 대하는 내 시각이 바뀔 뿐 (생략)

그 후로 신부님의 친절하지만 뼈 때리는 말씀들이 이어졌고, 생각보다 가벼운 보속을 받고 고해소를 나오는데 갑자기 내린 소낙비에 어떤 애기 엄마가 유모차 끌고 망연자실해하는 모습을 보고, 기꺼이 내 우산을 드리니 그녀가 한사코 사양한다.


어쩔 수 없이 유모차에 앉은 아가 때문에 목적지까지 동행하기로 합의하고, 함께 우산을 쓰고 명동역까지 가는 길에,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내심 뿌듯해하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매 달 마지막 목요일 저녁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미사가 있고, 그 미사에 참석하려고 안산에서 오신 거라고


지하철 역사에서 손을 흔들며 그녀와 그녀의 유모차와 헤어지며 속으로  '진짜가 여기 있네' 생각했다.


힘들겠지만 오늘부터라도 나대지 말아야겠다.
세상에는 진짜가 너무 많다.


#잊을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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