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조각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만언니 Dec 12. 2019

나이 치레

1. 매년 겨울이면 한 차례씩 꼭 앓았다. 올해도 어김없다. 독감 예방 주사를 맞지 못해 그런가 전보다 더 아프다. 지난 일주일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호되게 앓았다. 열이 들끓던 날들이 이어지더니 오늘에서야 좀 살 것 같다. 문득 나이 치레 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 때도 한 차례씩 아프더니, 늙어가면서도 꼭 한 번씩 아프다. 나도 나무처럼 겨울마다 하나 둘 잎을 떨구나 보다. 신기하다.


2. 어느덧 북미 여행 3 달째다. 떠나오기만 하면 가뿐할 것 같더니, 신산한 생의 고단이 여기까지 따라와 자꾸 머릿속을 헤집는다. 덕분에 장을 보다가도, 자전거를 타다가도 문득문득 서울에 두고 온 걱정거리들을 따져본다. 내년 봄이면 계약이 끝나는 월세집, 벌써부터 가난을 물려받은 조카들의 어두운 얼굴, 나한테 만큼은 두 번 다시 돈 얘기는 않겠다더니, 또다시 내게 돈 얘기를 하게 되어 슬퍼하던 엄마 목소리, 이런 가족들을 속으로는 열렬하게 증오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안심시키는 그러나 다분히 고압적이고 위선적인 내 모습들을 차례차례 떠올린다. 싫다. 다 싫다. 고개를 세차게 졌는다.  


3. 긴급하게 행복해지고 싶으니 지난날 행복했던 기억들을 뒤적인다. 추운 겨울 작은 오빠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 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을 사 먹던 일, 매일 아침 한 번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날 꽁꽁 싸 메주던 엄마의 다정한 손길, 밍크 담요를 치렁치렁 감은 나를 문 앞에 앉혀두고 연탄불에 군밤을 구워주며 좋아하던 할머니의 굽은 등, 때마다 묵주를 잡고 기도하던 그녀의 간절한 기도소리, 밖에서 놀던 나를 불러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손으로 내 언 귀를 녹이며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아버지 얼굴, 함께 쏟아지는 눈을 먹으며 환하게 웃던 꼬마 때 친구들, 보온 도시락을 나눠먹던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또 두고두고 고마운 사람들.


4. 갑자기 눈가가 일렁인다. 그래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살자. 새해에는 아프지 말자. 가능하면 좋은 생각들을 자주 하자. 또다시 아무나 덜컥 믿지는 말자. 하며 마음을 다시 잡아 본다.


6.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리고, 컴퓨터를 끄고 가 자리에 눕는다. 몸이 노곤해지니, 성난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행복한 일을 해야지 생각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 좋구나 생각하는 요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목요일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