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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Apr 13. 2020

자가격리 중입니다.

저는 지난 7일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어, 가까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확진 테스트받고 자가격리 중에 있습니다. 말랑말랑하고 길다란 면봉을 코가 뚫리기 직전까지 밀어 넣는 무시무시한 코로나 테스트를 받고, 집에 온 뒤로는 매일 성실하게 하루 한 번 '자가 격리자 안전보호' 앱을 열어 발열체크 문항들에 기록하고 제출하고 있습니다.


아직 별다른 증상은 없으니 이대로 이 시기가 잘 지나가길 희망해 봅니다. (아마 양성이었으면 구청에서 연락이 왔을 텐데 음성이어서 그대로 두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 정부 일 진짜 잘하네요. 보건소에서 손소독제 마스크 같은 건 물론이고 빨간색의 쓰레기봉투까지 줬어요. 디테일은 악마의 것인데 아무래도 대한민국 정부가 악마의 손에. 는 농담입니다.  

강력한 규제나 (Lock Down) 국가 봉쇄조치 없이 오로지 정부의 행정력과 국민의 '시민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 부쩍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간 사람의 혈압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나 확인하게 해 주었던 , 31번 확진자 같은 분들도 더러 있었지요. 하지만 미국에서부터 화장실도 안 가고 김장봉투를 쓰고 긴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는 유학생들부터 한참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도 안 내보내고 집에서 24시간 밀착 육아하는 이 나라의 많은 엄마들의 희생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상황을 생각보다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의료진과 질본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저는 전에 촛불집회에서 이미 느꼈어요. 누구의 통제도 없이 질서를 지키며 평화롭게 시위를 하던 20만이 넘는 시민들의 모습. 그런 이들이 속해있는 집단이고 국가라면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4월 초에 갑자기 자가 격리자로 분류되는 바람에 원래는 투표를 못하는 처지였는데, 다행히 오늘 구청에서 자가 격리자끼리만 따로 모아 투표할 수 있게 해 주겠다. 향후에는 보건소에서 별도의 지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해 줘서, 다행히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한 시간 동안 격리자들만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할 것 같다고 하네요. 만세


처음엔 현관문도 못 열고 나가는 이 상황이 좀 답답했는데, '나는 지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2주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다'라고 마음을 고쳐 먹으니, 생각보다 지낼만합니다. 아마 병원에서 이 정도 시설의 방에 있으려면 특실일 테고, 호사일 테니까요. 게다가 나는 지금 주사도 안 맞고 약도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외롭고 쓸쓸하긴 합니다만. 어쩌겠어요. 이것도 내 생에 새로 배달된 운명인 것을.  


자가격리 중에 글을 많이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줄도 못쓰고 있네요.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슬픔'을 쓰는 일이 힘에 부치고, '선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대하드라마 뺨치는, 기나 긴 실패역사를 기록하는 일 역시 달갑지 않고 말입니다. 또 여전히 사랑을 믿지 못하며 관계에 환멸까지 느끼는 내가,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들마저 증오하고 원망하는 내가, 태연하게 사람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위선처럼 느껴지고요. 해서 요즘은 매일같이 멍청한 얼굴로 노트북의 빈 페이지에서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써야겠지요. 시작했으니까 완주해야겠지요. 난 그런 사람이니까. 끝까지 하는 사람이니까. 네. 반드시 그래야겠지요. 다시 마음을 다 잡아봅니다.


글 새로 올릴 때마다 보내주시는 성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구독자 분들 브런치도 종종 가서 보고 있어요. (소심해서 좋아요는 많이 못 누르지만) 재미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저마다의 생의 서사들이 다른지, 때론 위로도 받고 공감도 하고 그럽니다.


모쪼록, 이 시절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요. 다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는 날들 보내시길 바랄게요. 저도 잘 극복해 보겠습니다. 힘


 2020. 4월에 산만 언니 올림

추신: 어제 심심해서 부활이기도 하고, 계란 찌고 붓질하고 사진 찍고 해 봤습니다. 자가격리 기간 길어지면 느닷없이 아티스트가 될 것 같습니다만, 더는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 우리 모두 사회적 거리 끝까지 잘 지켜서 이 시기 잘 넘어가 보아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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