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7일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어, 가까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확진 테스트받고 자가격리 중에 있습니다. 말랑말랑하고 길다란 면봉을 코가 뚫리기 직전까지 밀어 넣는 무시무시한 코로나 테스트를 받고, 집에 온 뒤로는 매일 성실하게 하루 한 번 '자가 격리자 안전보호' 앱을 열어 발열체크 문항들에 기록하고 제출하고 있습니다.
아직 별다른 증상은 없으니 이대로 이 시기가 잘 지나가길 희망해 봅니다. (아마 양성이었으면 구청에서 연락이 왔을 텐데 음성이어서 그대로 두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 정부 일 진짜 잘하네요. 보건소에서 손소독제 마스크 같은 건 물론이고 빨간색의 쓰레기봉투까지 줬어요. 디테일은 악마의 것인데 아무래도 대한민국 정부가 악마의 손에. 는 농담입니다.
강력한 규제나 (Lock Down) 국가 봉쇄조치 없이 오로지 정부의 행정력과 국민의 '시민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 부쩍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간 사람의 혈압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나 확인하게 해 주었던 , 31번 확진자 같은 분들도 더러 있었지요. 하지만 미국에서부터 화장실도 안 가고 김장봉투를 쓰고 긴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는 유학생들부터 한참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도 안 내보내고 집에서 24시간 밀착 육아하는 이 나라의 많은 엄마들의 희생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상황을 생각보다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의료진과 질본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저는 전에 촛불집회에서 이미 느꼈어요. 누구의 통제도 없이 질서를 지키며 평화롭게 시위를 하던 20만이 넘는 시민들의 모습. 그런 이들이 속해있는 집단이고 국가라면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4월 초에 갑자기 자가 격리자로 분류되는 바람에 원래는 투표를 못하는 처지였는데, 다행히 오늘 구청에서 자가 격리자끼리만 따로 모아 투표할 수 있게 해 주겠다. 향후에는 보건소에서 별도의 지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해 줘서, 다행히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한 시간 동안 격리자들만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할 것 같다고 하네요. 만세
처음엔 현관문도 못 열고 나가는 이 상황이 좀 답답했는데, '나는 지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2주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다'라고 마음을 고쳐 먹으니, 생각보다 지낼만합니다. 아마 병원에서 이 정도 시설의 방에 있으려면 특실일 테고, 호사일 테니까요. 게다가 나는 지금 주사도 안 맞고 약도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외롭고 쓸쓸하긴 합니다만. 어쩌겠어요. 이것도 내 생에 새로 배달된 운명인 것을.
자가격리 중에 글을 많이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줄도 못쓰고 있네요.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슬픔'을 쓰는 일이 힘에 부치고, '선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대하드라마 뺨치는, 기나 긴 실패역사를 기록하는 일 역시 달갑지 않고 말입니다. 또 여전히 사랑을 믿지 못하며 관계에 환멸까지 느끼는 내가,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들마저 증오하고 원망하는 내가, 태연하게 사람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위선처럼 느껴지고요. 해서 요즘은 매일같이 멍청한 얼굴로 노트북의 빈 페이지에서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써야겠지요. 시작했으니까 완주해야겠지요. 난 그런 사람이니까. 끝까지 하는 사람이니까. 네. 반드시 그래야겠지요. 다시 마음을 다 잡아봅니다.
글 새로 올릴 때마다 보내주시는 성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구독자 분들 브런치도 종종 가서 보고 있어요. (소심해서 좋아요는 많이 못 누르지만) 재미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저마다의 생의 서사들이 다른지, 때론 위로도 받고 공감도 하고 그럽니다.
모쪼록, 이 시절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요. 다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는 날들 보내시길 바랄게요. 저도 잘 극복해 보겠습니다. 힘
2020. 4월에 산만 언니 올림
추신: 어제 심심해서 부활이기도 하고, 계란 찌고 붓질하고 사진 찍고 해 봤습니다. 자가격리 기간 길어지면 느닷없이 아티스트가 될 것 같습니다만, 더는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 우리 모두 사회적 거리 끝까지 잘 지켜서 이 시기 잘 넘어가 보아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