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싫었다. 동생이 없어서 일까, 모르겠다. 그냥 어려서부터 아이를 싫어했다. 그뿐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아이를 예뻐해야 한다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도 싫었다. 해서 오랜 세월 나는 카페나 식당에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와 눈을 맞추고 웃어도 고개를 획 돌리고, 못 본 척 내 할 일을 마저 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도 그랬다. 산부인과 유리벽 너머로 조카를 보는데,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생각했다. 혹시 애들을 새 언니가 아니라 오빠가 직접 낳으면 지금보다 더 좋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었다. 오빠가 낳았다고 해도 딱히 더 예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친구나 친척들이 잠깐 화장실 다녀오게 애 좀 봐달라고 하면 애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아이 옆구리에 양손을 넣어 들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엄마들이 잽싸게 달려와 버둥거리는 애를 얼른 채서 품에 안았다. 그래도 몰랐다. 대체 애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또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건 또 어찌나 싫던지, 특히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하는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 말 못 하는 아이들이 죽는다고 울어대면 나는 점퍼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귀를 막고 인상을 썼다. 어른도 힘든 이 길에 애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그저 눈 앞에서 빽빽 우는 애 때문에 목적지까지 편히 가지 못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그렇다. 나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보육원에 드나들기 전까지 애들은 재우면 자고, 먹이면 먹고,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천만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자기 멋대로 였다. 그게 아이들의 특징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실은 타고난 천성 자체가 남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본래 그런 성격에다 스무 살에 큰 사고까지 겪으니, 그나마 있던 타인에 대한 관심이 더 없어졌다. 뭐라고 해야 하지, 사고 이후로 세상일에, 남의 일에 좀 더 무심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 후로 오래도록 나는 내 마음 하나 돌보기 바쁜 생을 살았다. 내 마음은 나 혼자 있기에도 좁아 다른 사람을 들일 틈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사는 동안 내내 나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 문제를 일으켰다.
어려서는 싹수없다. 소리를 많이 들었고, 나이 먹고 나서는 재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내 성격이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다.
그러다 훗날 삼풍 사고 후유증으로 (Long Term PTSD)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상담치료를 받으며, 많은 날 절에 가 앉아 홀로 수행을 하며, 내가 앓는 마음의 병에 대해 공부하다 문득 "더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나 같은 경우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게 밖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했다.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근처 보육원으로 우연히 봉사를 가게 된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괜히 여러 사람 만난다고 돈 들여 시간 들여 어디 멀리 갈 필요 없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일단 여기 오면 무조건 많은 사람들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내가 찾던 최적의 장소였다. 그뿐인가 수녀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학교나 책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자연에서 배울 수 있었다. 봄에는 산에 어떤 나물이 피고, 여름 꽃은 어떻고, 가을 열매는 어떻고, 겨울 산은 어떠한지. 산을 뒤로 두고 있는 성심원은 서울 출신인 내게 말하자면 "생태학교" 같은 곳이었다.
그뿐 아니다. 주방에 가 보조를 하면 각각의 반찬은 어떻게 저장해야 하는지, 재료의 손질과 보관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또 본관에 가 청소나 빨래를 하면 세제는 어떻게 쓰면 좋은지 세심하고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엄마한테 배워도 된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평소에도 자식사랑이 유별나신 분이라 항상 나를 티브이 앞에 물오징어처럼 가만히 눕혀놓고, 자신이 모든 걸 하시기에 이런 건 도저히 배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엄마 감자전 어떻게 만들어?" 하고 내가 물으면 엄마는 하던 일을 즉각 멈추고 "감자전 먹고 싶니? 엄마가 금방 해줄게" 그러고는 주방으로 가 바로 감자를 간다. 먹고 싶어 물어본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이깟거 일도 아니라면서 손사래 치며 음식을 한다. 그러니 이런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나는 보육원에 가야만 집안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희한하지 남들은 다 싫다는데, 나는 또 이런 살림살이 배우는 게 재밌었다. 그러니 종일 쭈그리고 앉아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도토리를 까도 좋았고, 온종일 서서 김장무를 다듬어도 좋았다. 해서 그 무렵 나는 틈만 나면 자꾸 성심원으로 달려갔다. 종일 노동한 대가로 콩 한 봉지나 사과 몇 알을 받아와도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원장 수녀님이 갑자기 어떤 애 하나를 불쑥 내밀며 나한테 당신 일 하시는 동안 아이 좀 보고 있으라 하셨다. 아가의 집 (만 24개월 미만 아이들을 별도로 양육하는 곳) 애들이 너무 울어서, 하나 데려와 봐 주고 있는데, 이 아이 때문에 도저히 업무를 못 보신다고 말이다. 그렇게 얼결에 아기를 안아 들었는데 정말이지 눈앞이 깜깜했다. 해서 수녀님께 용기 내어 "저 아이 못 보는데요" 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빙긋 웃으시더니, 일단 밖에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밖에 나가면 한 시간 정도는 잘 놀 테니 데리고 나가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왠 걸, 밖에 나오자마자 애는 수녀님께 다시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해서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서 우는 애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때마침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지나가다 애가 우니까 달려와서는 기가 막힌 솜씨로 애를 얼르고 달랬다. 해서 그날 나는 초등학생 몇몇을 잘 구슬려서 아이들과 함께 아기를 봤다. 그때 생각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그 일 이후로 나는 더 필사적으로 "아가의 집"을 멀리했다. 보통 보육원에 봉사 오는 분들은 대부분 아기들 보러 오는데 나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가의 집 창밖으로 울음소리가 새 나와도 못 들은 척하고 본관으로 잽싸게 뛰었다. 한데 언젠가부터 자꾸 아가의 집에 불려 가게 됐다. (*시설운영 원칙상 8개월 이후 아이들은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에 주 1회 2시간 이상 정기적인 자원봉사가 가능한 분들만 교육 등의 일정 절차를 밟은 후 이곳을 출입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께서 간혹 뜻밖의 일이 생겨 약속된 시간에 두어 분이 함께 못 오시는 날이면 손이 부족한 티가 금세 나 아가의 집은 순식간에 전쟁통이 되곤 했다. 특히 선생님들이 쉬는 연휴나 명절은 더 했다. 그런 와중에 때마침 초등학생 학습봉사로 온 내가, 신원조회와 건강검진표까지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사무실에 제출한 상태인 내가, 자꾸 보육원에서 하릴없이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니, 수녀님의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 없었다.
최근 개정된 사회복지 법은 바뀐 걸로 아는데, 내가 아이를 돌보기 시작한 당시 (2014년) 사회복지법상 시설에 배치되는 임직원은 보육아동 2.5명당 1명이었다.(서울시 기준) 하지만 그 인원이 전부 아이를 보는데 배정된 건 아니었다. 간호사, 영양사 등의 관리직을 빼면 풀타임으로 보육 업무만 하는 인력은 늘 부족했다. 그럼 현실적으로 복지사 선생님 한 분당 맡은 아이들이 일곱 명 정도였다. 해서 아가의 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절실하다. 왜냐면 아이들을 단체로 키우다 보면 대부분 다들 엇비슷한 시간에 함께 자고 같이 눈을 떠 동시에 밥 달라고 울기 때문이다. 당시 보육원 별관 아가의 집에는 24개월 미만이 열댓 명, 7세 이전 아이들이 열두어 명이었기에 어떤 날은 정말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날도 있었다.
이런 연유에서 아가의 집에 파견됐지만 나는 꿋꿋하게 아이 보는 일만큼은 피하고자 일단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청소나 설거지 같은 걸 닥치는 대로 했다. 괜히 놀고 있다가 누가 또 덜컥 나한테 애를 맡길까 무서워, 때로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겨울에 모기장까지 뜯어 닦았다.
하지만 이 짓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나는 울면서 나를 향해 기어 오는 애들을 차마 어쩌지 못해,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또 희한하지, 잠투정을 하던 아이들이 이내 하나 둘 졸린 눈을 비비다 내 품 안겨 잠들었다. 처음엔 그게 또 신기해서 졸린 애만 보이면 얼른 둘러업고 잘 때까지 안아재웠다.
이건 나중에 안 건데, 다들 요령껏 어깨나 팔목에 무리 가지 않게 애를 안고 달래다 앉아서 토닥이다 눕히다 한다는데, 나 혼자 무식하게 팔이야 빠져라 어깨야 무너져라 하며 애들을 잠들 때까지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기를 보고 온 날엔 온몸이 아파 잘 밤에 누워 차라리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하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점점 아이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됐고, 월령별 아이들의 특징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렇게 아이 보는 일이 손에 익어 느긋해지자, 태어나 처음으로 남의 마음이, 그러니까 잠든 아이의 마음이 오롯이 궁금해졌다. 분유 맛은 어떤지, 양은 적당한지, 기저귀 착용감은 어떤지, 어디 따로 불편한 데는 없는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꿈을 꾸며 자는지.
그러다 한 번은 반드시 포대기로 업어줘야 자는 애가 있어, 그 아이를 등에 업고 운동장에 나가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애를 재우는데, 그 순간 온전히 나를 믿고 잠든 아이의 심장 박동이 온몸에 느껴졌다. 그 후로 연이어 들려오는 아이의 규칙적인 숨소리, 아이의 체온 같은 게 하나하나 전부 전해지니, 갑자기 심장이 툭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사랑이었다.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사랑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참 사람일 알 수 없지, 처음엔 내가 이곳에서 아이들이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되려 내 마음의 빈 곳을 채워주며 나를 성장시켜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있었던 거다.
그뿐 아니다. 아이들이 내 마음에 뛰어 들어와 맘 껏 놀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의 지평은 전보다 넓어졌다. 얼마나 넓어졌는가 하면 아이들이 장난치다 있는 힘껏 머리로 코를 들이박아 대낮에 별을 봐도 나는 좋다고 깔깔대며 웃기만 했다. 전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아이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나는 끝까지 외로운 줄도 모르고 혼자 고독하게 세상으로 향해 난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았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니 이제 안다. 사람은 본래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는 걸, 그 후로는 희한하지, 이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전부 예뻐 보인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자 어느 날은 이 예쁜 아이들의 양육을 포기한 부모들이 너무 미워 수녀님께, 사람들은 왜 대체 키우지도 못할 아이들을 덜컥 덜컥 낳는 거냐고, 차라리 국가에서 애초에 부모 자격 같은 걸 발급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아이 키울 자격 있는 사람만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 글쎄 그런 자격이 있으면 세상 사람 몇이나 그 시험 통과할까, 사람 다 거기서 거기야, 전부 조금씩은 모자라, 얘들 부모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다들 잘해보고 싶었겠지 하지만 일이 뜻대로 안 된 거뿐이야" 하셨다.
그러고 보니 수녀님 말씀이 맞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애초에 자기 자식 고생하길 바라며 아이를 품 안에서 열 달이나 키우다 낳는단 말인가, 그럴 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작에 낙태했겠지.
그러니 그런 애를 떼 놓고 사는 부모들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오며 가며 아이를 돌 본 나도 이렇게 두고 온 애들이 눈에 밟혀 가끔 잠을 설치는데, 그들의 밤은 어떻겠는가, 분명히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겠지,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지난해 2월부터 아이들을 여태 못 봤다. 코비드 시대에 어디라고 힘들지 않겠느냐마는 힘들기로는 시설 역시 만만치 않다. 코로나 이후 나를 포함한 자원봉사자의 출입이 전면 통제됐으며 가정 체험을 포함한 아이들의 외출 또한 전면 금지됐다. 코로나 시대 속 보육원을 보면 단체의 안전과 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정부지침에 따르는 시설의 결정에는 불만 없다. 하지만 사람이 한참 그리울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전에 아이를 돌볼 때마다 항상 아이를 안고 "내가 대신 슬플게, 너는 행복하기만 해 "라고 말해주었는데, 이 상황은 내가 뭘 어떻게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더 속상하다. 그러니 어서 이 비극의 시대가 얼른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