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에게 몸은 전투장비이다. 이를 실전해서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여러 무술을 익힌다. 그 이유는 싸움에서 이겨 살아 남기 위한 것이다.
특공무술은 적지종심작전 부대가 적진에서 무기, 장비, 탄약 등의 활용이 제한되었을 때 적을 근접거리에서 제압하기 위한 실전 무술이다.
강습부대 또한 적의 깊숙한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신체를 병기와 같이 단련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전입 초반에는 특공무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OBC(초군반) 시절에 각 군단별 특공연대로 전입 가는 동기들과 연락을 해보면 특공무술을 한다는 부대도 별로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특전사에서는 시행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대에서 우수하다는 부소대장급 간부들이 ㅇ공수특전여단으로 교육을 갔다. 약 4주간 의 파견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같은 ㅇ여단에서 특공무술 집체교육을 위해 상사급 5명이 2주간 파견을 왔다. 그때부터 우리 부대에 특공무술 Boom이 일어났다. 인접부대 동기들과 통화해 보면 '너네가 그런 걸 왜 해?'라는 반응이 많았다.
7월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우리는 구형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고 모였다. 주변에서는 태권도가 0단이라느니 복싱을 0년 했다느니 시덥지 않은 농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교관님이 등장했다.
상의를 안으로 들여 입지 않아도, 3선 일치 등 복장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 편안함을 느낀 것도 잠시...
2시간 정도 지나자 모두 웃음기는 싹 사라졌다. 체력에 나름대로 자신 있다던 선배 동기들 모두 시뻘건 얼굴로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발차기와 팔 동작, 괴상한 고함 소리, 중간에 점프하는 낙법도 빠지지 않았다. 적을 순식간에 제압해야 하는데 모두 동작이 율동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오전 교육이 끝났을 때 녹색 전투복은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신기하게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주간의 집체교육 끝이 도래하고 있었다. 모든 간부와 용사는 교육결과를 보여야 했다. 특히 간부는 용사와 함께 시연하고 간부만 따로 모여 한번 더 하는 해야 했다. 이런 지시는 누가 내렸는지 모든 간부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간부가 먼저 하게 한 그분이었다.
생활관에서 안면 위장을 하는데 얼굴에 사선으로 테이프를 붙이고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해준다. 자연스럽게 얼굴에 사선으로 검은색 선이 그어졌다. 모두의 표정은 어느새 적의 진지로 돌격하기 전 착검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사열도 특이했다. 중대장의 지휘 하에 대형을 갖추었다. 그런데 또 그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좌로 번호!' '하나! 둘! 셋!~열! 번호 끝!' '홀수 좌향~좌! 짝수 우향 우!'
앗! 역시 기습이다. 서로 마주 보며 긴장만 한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분명 사열대를 보며 곁눈 질 하며 실력이 좋은 앞사람만 따라가도 되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틀렸으면 열외 해라!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중간에 순서를 놓치거나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나와야 했다. 모른 척 계속하면 어김없이 그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ㅇㅇㅇ, ㅇㅇㅇ 열외!'
대형을 이탈하거나 동작이 어설퍼 지목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이탈해야 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창피했다. 그리고 이번에 탈락하면 한 달을 넘게 노력한 특공무술을 어디에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 같다.
사열은 이탈하는 사람, 지적을 받아 나오는 사람 등이 혼재되었지만 결국 잘 끝났다. 부대 개방 행사, 인접 중학교 안보캠프 등에서 활약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군사경찰대(구 헌병대)에서 대테러 요원들이 특공무술을 배우러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도 tv나 유튜브 등에서 하는 특공무술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그 자체에 대한 반가움인지 그 시절 땀 흘리며 배워가던 그것을 안 해도 되는 안도인지모르겠다.
어쩌면 설마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린다. 지금은 불룩 나온 배 때문인지 이런 이야기를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해보라 하면 솔직히 자신도 없다.
힘들었던 그 순간 속으로 다시 가지 않아서 좋긴 한데 마음은 나도 모르게 그때로 달려간다. 그때 분명히 우리 부대의 연병장은 특공무술로 생과 사가 갈리는 현장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사치스러운 회상이 아직도 뜨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