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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as Jun 16. 2022

정든 곳 떠나려니   211231 0030

좀 이따 봅시다. 잘 살다 갑니다' (묘비에 남겨도 좋을 듯하다)

정든 곳 떠나려니   211231 0030
(연대장 마지막 편지 10호)

'좀 이따 봅시다. 잘 살다 갑니다'
(묘비에 남겨도 좋을 듯하다)

떠나려니 지키지 못한 약속, 챙기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다. 낯선 곳에서의 설레임, 기대, 희망, 두려움, 놀라움 등이 섞인 기분이다.

떠나려니 감사한 분들이 많다. 한 참 선배님들, 후배들 사이에 끼여 생활한 일상이 그리워 질 것이다. 성실하게 법규를 잘 따르던 예비군 지휘관님들이 반듯하다. 나만 엉성한듯...

각지게 깎은 머리, 희끗희끗 내린 안개꽃으로 꾸며 놓은 듯도 하다. 한참 어린 후배 지휘관에게 깎듯한 군대예절!

아직도 스스로들 현역인 줄 착각도 한다. 감사한 일들도 한 둘이 아니다. 밥 맛이 없을거라고 불러도 주신다. 퇴직시까지 전역병들에게 졸필 내 책을 육군 홍보용으로 선물하시겠다는 황송함, 고향 특산물을 사무실에서 주시는 순수함, 천사같은 아들을 가진 동병상련, 동향 선배, 좋은 글 보내 주시는 깊은 인품, 힘든 임무, 어려운 시기를 인내한 후의 소주 잔에 비친 글썽이는 눈시울, 반듯한 차렷 자세의 브리핑...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훌륭한 스승들이시다. 이제 그들을 뒤로 하고 새로운 곳으로 소풍 갈 준비를 하려니 아쉽기도 설레기도 하다. 내일이면 떠난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응봉길 KCTC 김부장!

감사하면 또 다른 감사가 찾아 온다며 감사노트 작성을 입에 붙이고 다녔다.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사할 줄 아는 장교의 표상이 된듯 싶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역 부하들이 기분을 상하게 할 때 밖으로 나갔다. 선배들을 보면 조심해지기 때문이다. 나름 노력했지만 분명 헛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도 불편한 안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배워야 할 점이다. 많이 반성하고 뉘우쳤다. 감사한 분들이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귀한 배움의 터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할 시간이다. 아쉽다. 많은 계획, 약속 지키지 못한 것이...

가능하다면 그분들이 다시 불러주신다면 잘 해보 싶다. 내년 이맘 때 그리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년 있다 가는 마음이 이 정도인데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어떨까?

하루하루 주어지는 기적같은 24시간을 선물로 여기며 의미있고 가치있는 흔적을 남겨야겠다. '부하의 영혼을 훔치는 지휘관'이라는 목표를 얻기 위해 나의 영혼을 그들에게 먼저 주어야 한다는 믿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모든 걸 뒤로하고, 아니 돌아갈 수도 없는 지나간 순간순간들 대신해 다시 걸어 가련다.

짧은 인생! 잘 살아야 한다!

이런 후회 안하고 싶다.

현역들에게도 많이 배웠다. 열악한 환경, 1인 다역의 과중한 임무, 외출 외박도, 휴가도 제대로 못가는 코로나 시대를 긍정과 감사, 인내와 충성심으로 이겨 준 그들!

'부하의 복지는 지휘관의 자존심이다'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의심하지 않고 믿어 준 그들!

'적과 지휘관은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재촉에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따라 준 그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부족한 사람을 믿고 따라 준 순수한 영혼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자발, 본질, 도리'라는 말도 안되는 구호를 행동으로 실천해 준 전우들과 같이 한 순간 순간이 행복했다.

그들도 나와 같을까?

돌아보니 끝까지 욕심이 많았다. 내년은 올 해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어떠한 역경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이겨내는 그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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