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물결을 만들어 나가는 것

오늘의 피아노 연습 일지

by 스밍


2021. 8. 4. 수요일의 피아노 연습 일지


오랜만에 피아노 연습실을 찾았다. 학원이 아닌 피아노 연습실에 가는 경우는 대개 양심에 찔려서다. 이렇게 연습실에 오면 갑자기 내가 막 대견스러워 티를 내고 싶다. 하지도 않는 인스타를 켜, 스토리를 올리며 낼 수 있는 생색도 다 낸다. 오늘도 스토리를 켰는데, 녹화된 걸 들으니 마디 사이의 내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게 아닌가. 얼굴이 홧홧해 얼른 스토리를 지웠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오랜만에 <스무스>를 다시 보는데, 모든 이야기가 나 같은 거다. <스무스>의 끝머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스무스 : 태재 작가님의 책. 매일 수영을 배우며 느낀 점을 옮긴 수영 일지다.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수영장에 갔던 모든 날이 의미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만 실컷 먹었던 날,
다리에 쥐가 났던 날, 너무 숨이 차서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했던 날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의미와 무의미를 기록하고
또 다듬은 덕분에,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는 나의 호흡을 가다듬게 해 주었고 나의 무력감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때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악보에는 군데군데 크게 쉼표가 그려져 있고, 늘 레슨 때 숨을 쉬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나도 정말 숨을 쉬고 싶은데, 언제 어디서 들이마시고 내뱉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늘 그렇게 무호흡의 상태로 쫓기듯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 보니 숨이 모자라 난데없이 페달이 끊기기도 하고, 들이마셔야 할 때 내쉬고 내쉬어야 할 때 들이마시기도 했다. 도(>)시레로 악센트를 앞에 두고 연주해야 할 곡이 도시레(>)가 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삐걱삐걱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쳤다.


선생님은 내 숨통을 틔우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썼다. 한 프레이즈가 끝나면 손도 페달도 모두 떼고 몇 초간 멈춰보는 방법, 프레이즈가 끝나면 숨을 들이마시는 방법, 마디의 강약 조절을 더 자잘하게 나눠 보는 방법 등등 갖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노력에도 숨을 쉬는 법은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호흡에 신경을 쓰면 나머지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를 막 시작한 사람들도 나처럼은 숨을 못 쉬진 않았다. 사람들은 숨쉬기 운동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운동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만 이렇게 어려운 일인 건지 억울하기도 하고 좌절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악보에 적힌 커다란 쉼표를 볼 때마다 조금씩은 숨을 쉬려 노력했다.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쉬었던 숨들이 어느새 나의 호흡으로 자리한 모양이다. 영상 속 민망했던 숨소리는 분명 곡의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한 프레이즈에 숨을 같이 내뱉고, 프레이즈가 끝나면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수많은 유의미한 날들과 무의미한 날들은 모두 모여 분명 나를 나은 방향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잘 된 호흡에 기뻐하고 잘못 쉰 숨들에 좌절하며 더 살펴보고 다듬은 덕분에, 드디어 얕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 자연스러운 호흡을 내쉴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시간들이 모여 내 물결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파도를 만들어 나가야겠지. 여전히 피아노는 내게 어렵고 갈 길은 첩첩산중이지만, 높았던 하나의 계단을 오른 것 같아 뿌듯한 오늘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