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피아노 연습 일지
2021. 8. 4. 수요일의 피아노 연습 일지
오랜만에 피아노 연습실을 찾았다. 학원이 아닌 피아노 연습실에 가는 경우는 대개 양심에 찔려서다. 이렇게 연습실에 오면 갑자기 내가 막 대견스러워 티를 내고 싶다. 하지도 않는 인스타를 켜, 스토리를 올리며 낼 수 있는 생색도 다 낸다. 오늘도 스토리를 켰는데, 녹화된 걸 들으니 마디 사이의 내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게 아닌가. 얼굴이 홧홧해 얼른 스토리를 지웠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오랜만에 <스무스>를 다시 보는데, 모든 이야기가 나 같은 거다. <스무스>의 끝머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스무스 : 태재 작가님의 책. 매일 수영을 배우며 느낀 점을 옮긴 수영 일지다.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수영장에 갔던 모든 날이 의미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만 실컷 먹었던 날,
다리에 쥐가 났던 날, 너무 숨이 차서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했던 날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의미와 무의미를 기록하고
또 다듬은 덕분에,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는 나의 호흡을 가다듬게 해 주었고 나의 무력감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때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악보에는 군데군데 크게 쉼표가 그려져 있고, 늘 레슨 때 숨을 쉬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나도 정말 숨을 쉬고 싶은데, 언제 어디서 들이마시고 내뱉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늘 그렇게 무호흡의 상태로 쫓기듯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 보니 숨이 모자라 난데없이 페달이 끊기기도 하고, 들이마셔야 할 때 내쉬고 내쉬어야 할 때 들이마시기도 했다. 도(>)시레로 악센트를 앞에 두고 연주해야 할 곡이 도시레(>)가 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삐걱삐걱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쳤다.
선생님은 내 숨통을 틔우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썼다. 한 프레이즈가 끝나면 손도 페달도 모두 떼고 몇 초간 멈춰보는 방법, 프레이즈가 끝나면 숨을 들이마시는 방법, 마디의 강약 조절을 더 자잘하게 나눠 보는 방법 등등 갖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노력에도 숨을 쉬는 법은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호흡에 신경을 쓰면 나머지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를 막 시작한 사람들도 나처럼은 숨을 못 쉬진 않았다. 사람들은 숨쉬기 운동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운동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만 이렇게 어려운 일인 건지 억울하기도 하고 좌절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악보에 적힌 커다란 쉼표를 볼 때마다 조금씩은 숨을 쉬려 노력했다.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쉬었던 숨들이 어느새 나의 호흡으로 자리한 모양이다. 영상 속 민망했던 숨소리는 분명 곡의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한 프레이즈에 숨을 같이 내뱉고, 프레이즈가 끝나면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수많은 유의미한 날들과 무의미한 날들은 모두 모여 분명 나를 나은 방향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잘 된 호흡에 기뻐하고 잘못 쉰 숨들에 좌절하며 더 살펴보고 다듬은 덕분에, 드디어 얕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 자연스러운 호흡을 내쉴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시간들이 모여 내 물결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파도를 만들어 나가야겠지. 여전히 피아노는 내게 어렵고 갈 길은 첩첩산중이지만, 높았던 하나의 계단을 오른 것 같아 뿌듯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