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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발라드 1번 연습 일지

by 스밍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습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아무리 많아도 일주일에 다섯 시간 정도를 낼 수 있는 불성실한 취미생에게는 버거운 곡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 특징 : 악보를 봐도 어려운지 아닌지 잘 몰라서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당연히 두 번째 레슨부터 황망했고 연습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전보다는 부지런히 학원과 연습실에 간다. 여행을 하고 와서 눈이 반쯤 감겨도 연습실로 가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면 근처 연습실을 예약해 꼭 연습을 하고 간다. 술자리를 하고 나서 술에 만땅 취해서는 연습을 하지 못한 죄책감에 피아노 연습실로 향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아주 더럽게 못치는 것이다. 심한 날에는 딱 두 마디를 세 시간 동안 내리 연습했는데도 헤매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피아노 앞에서 엉엉 울면서 피아노를 친다.


올해 발라드 네 개를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내가 얼마나 알량한지. 꼭 그런 날에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초4 쇼팽 발라드 1번 영상' 이런 걸 내게 보여주곤 한다. 그럼 나는 더 큰 좌절감에 찌들어있다가 몸을 일으켜 연습실로 향한다. 뭐, 내가 천재는 아니니 그냥 계속 칠 수밖에.

연습이야 그런다 쳐도 문제는 레슨이다. 선생님 앞에만 가면 연습 땐 그나마 잘 쳤던 부분도 순조롭게 망해간다. 점점 아득해져 가는 내게 선생님은, 자신 없다고 음을 날려버리지 말고 악보에 있는 음을 하나하나씩 소중히 아껴주자고 했다. 그럼 음표들에게 정말 미안해지는 것이다. 치기 급급해 흐린 눈 했던 악상 기호와 셈여림들에게도 멋쩍어진다.

다시 손을 올려 건반을 만지면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소리가 난다. 새삼 내가 소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아직 악보대로도 연주하지 못해 늘 정신없는 내가 어떻게 소리까지 만들어 내야 할지 막막해진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은 발라드 1번의 맨 첫음을 자신의 관이 꽝 닫히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며 나도 곡에 이야기를 붙여보기 시작하라고 했다. 그 순간 뜬금없이 떠올랐던 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역)의 총구였다. 그다음으로는 총소리, 이방인과의 만남, 의병들, 또 함안댁과 행랑아범, 그렇게 한 부분씩 색깔이 입혀져 간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한 음표씩을, 한 마디씩을 아끼며 만들어간다. 아주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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